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꼽추 소녀가 금속공에게 보내는 편지/ 마리아 주제 : 김한민 옮김

검지 정숙자 2020. 5. 4. 03:04



    꼽추 소녀가 금속공에게 보내는 편지

    - 페르난두 페소아『페소아와 페소아들』


    마리아 주제/ 김한민 옮김



  안토니우 씨께,

  당신은 이 편지를 읽게 될 리 없지만, 그리고 아마 저도, 결핵에 걸려버렸으니, 제가 쓴 걸 다시 읽을 리 없겠지만, 당신이 모르더라도 전 당신께 편지를 쓰고 싶어요, 왜냐하면 쓰지 않고선 터져버릴 테니까요.

  당신은 제가 누구인지 모르죠, 아니, 알긴 알아도 모르는 것과 다름 없죠. 당신은 날 본 적이 있어요, 금속 작업장으로 가시는 길에, 당신이 지나가는 걸 창문으로 보고 있는 저를요, 난 당신이 지나가길 기다리고 있고, 언제 지나가는지도 알고 있으니까요. 아마 당신은 노란색 건물 2층에 사는 꼽추 소녀에 대한 생각 따윈 해보지도 않았겠지만, 저는 당신에 대한 생각을 멈춘 적이 없답니다. 나는 당신에게 애인이 있다는 걸 알아요     키가 큰 금발 미녀 말예요. 전 그녀가 부럽긴 하지만 질투를 하진 않아요, 난 아무런 권리도, 질투를 할 권리조차 없으니까요. 난 그냥 당신이 좋기 때문에 당신이 좋은 거고, 제가 다른 여자가 아니라는 게, 다른 몸과 다른 외모를 가진 사람이 아닌 게, 저 거리로 내려가, 설령 당신이 그럴 동기를 주지 않는다 해도 그렇게 당신에게 말을 걸 수 없다는 게 슬퍼요, 하지만 난 그렇게 당신과 말을 트면서 서로 알게 되면 좋겠어요.

  당신은 제가 병든 내내 간직해온 모든 의미이고, 당신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지만, 난 당신께 감사하답니다. 전 사랑받을 만한 몸을 가진 사람들이 사랑받는 것처럼은 절대 사랑받을 수 없겠지만, 저에게도 누군가를 좋아할 권리는 있죠, 비록 되돌려 받진 못하더라도 말예요, 그리고 저에겐 울 권리도 있죠, 왜냐하면 그건 누구한테서도 빼앗을 수 없는 거니까.

  난 당신과 딱 한 번만 대화를 해보고 난 다음에 죽고 싶어요, 하지만 절대 당신한테 말을 걸 용기가 생기지 않을 거예요, 말을 걸 방법도 모르겠고요. 내가 당신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당신이 알면 좋겠지만, 그걸 알고 나서 당신이 아무런 으의도 두지 않을 것이 두렵고, 굳이 확인을 해보기도 전에, 그게 너무나 분명한 사실임을 알기에 참으로 슬프고, 그래서 확인할 생각도  없어요.

  전 태어나면서부터 꼽추였고 늘 웃음거리였어요. 사람들은 대개 꼽추들은 다 못됐다고 생각하지만, 전 한 번도, 그 누구를 향해서도 나쁜 생각을 품어본 적이 없어요. 게다가 전 병이 들어버렸고, 크게 화를 낼 기운조차 없답니다. 전 이제 열아홉 살인데, 대체 어쩌다 이렇게까지 오래 살았는지 모르겠어요, 그리고 병은 들었는데, 아무도, 제가 꼽추라서가 아니라면 저를 위해 슬퍼해주지 않아요, 그게 문제가 아닌데, 아픈 건 내 몸이 아니라 내 영혼인데, 왜냐하면 꼽추인 게 아픈 건 아니거든요.

  저는요, 당신이 애인과 어떻게 지내는지까지도 알고 싶어요, 왜냐하면 그게 바로 제가 영영 가질 수 없는     더군다나 이제 삶이 거의 끝나가는 마당에는 더욱 더 가질 수 없는     그런 삶이니까. 그래서 속속들이 알고 싶어요.

  당신을 알지도 못하면서 이렇게 길게 쓰는 걸 용서해요. 하지만 당신은 이걸 읽지 않을 테고, 혹시 읽는다 하더라도, 이게 당신에 관한 것이란 걸 깨닫지도 못하거나, 어찌 됐든 신경도 쓰지 않을 테니까요, 하지만 생각해줬으면 좋겠어요, 곱사등이로 태어나서 늘 창문가에만 앉아 있어야 하는 게 얼마나 슬픈 일인지, 엄마와 자매들을 제외하면 아무도 우리를 좋아해주지 않는, 그렇지만 가족들이야 그게 당연한 거고 가족이라서 좋아하는 거니까, 하긴 누가 전에 하던 말처럼, 뼈가 거꾸로 뒤집힌 인형한테 남을 수 있는 진짜 최악의 상황은 이것조차도 없는 것이겠지요.

  어느 아침에, 당신이 공장으로 가는 길에, 내 창문 맞은편 길목에서 고양이 한 마리가 개랑 싸움이 붙어서, 다들 구경을 하고 있었는데, 그때 당신도 마누엘 다스 바르바스 근처, 골목에 있는 이발소 맞은편에서 구경을 하다가, 내가 있는 창문 쪽을 봤고, 내가 웃는 걸 보고 당신도 내게 웃어줬고, 그게 당신과 제가 단둘이 존재했던 유일한 순간이었죠, 이를테면 말이에요, 그건 제가 절대 바랄 수 없었을 일이었으니까요.

  당신은 상상도 못할 거예요, 얼마나 자주 내가 당신 지나가기를 기다렸는지, 당신이 지나갈 때, 길에서 무슨 다른 일이라도 일어나 다시 나를 보는 당신을 볼 수 있을까, 당신이 나 있는 곳을 올려다보도록, 그럼 나도 당신을 바라볼 거고, 그러면 당신의 두 눈이 내 두 눈을 정면으로 바라보는 걸 볼 수 있게.

  하지만 전 한 번도 바라는 것을 얻어본 적이 없고, 그게 제가 태어난 방식이겠죠, 심지어 창문 밖을 내다보기 위해서도 제 의자 밑에 작은 단상 같은 게 있어야 해요. 저는 사람들이 저희 어머니에게 빌려주는 패션 잡지들에 실린 그림들을 보면서 하루를 보내지만, 늘 딴생각을 하면서 봐요, 그러다 보니 누군가 나한테 그 치마가 어떻게 생긴 거였는지, 영국 여왕과 함께 사진에 있던 사람은 누구였는지 물어볼 때면, 가끔은 기억을 못하는 저 지신이 부끄러워서 얼굴이 빨개지죠. 왜냐하면 저는 누릴 수 없는 것들을 보고 있던 거라, 그것들이 제 머릿속에 들어와서 절 기쁘게 하도록 놔둘 순 없었거든요, 나중엔 아예 울고 싶어져버릴 테니까.

  그러면 모두들 괜찮다고 넘어가주면서도 속으론 내가 바보라고 생각하죠, 하지만 멍청하다고 생각하진 않아요, 왜냐하면 아무도 내가 멍청이라고 생각하진 않으니까, 그리고 사람들이 넘어가주든 말든 슬프지 않아요, 왜냐면 그렇게 하면 적어도 내가 왜 딴 데다 정신을 팔고 있었는지 설명하지 않아도 되니까.(p. 211)

  아직도 그날이 기억나요, 당신이 어느 일요일 날에 밝은 파랑 정장을 입고 지나가던 날, 아니 밝은 파랑은 아니었지만, 보통의 진한 파랑보다는 훨씬 밝은 서지(serge. 양모로 만든 천으로 군복, 정장, 트렌치코트 등의 옷에 많이 사용된다.)로 만든 옷이었죠. 당신은 딱 그날 날씨처럼 아름다워 보였고, 전 그날만큼 다른 모든 사람이 부러웠던 날도 없었을 거예요, 하지만 당신 여자 친구를 부러워하진 않았어요, 만약 당신이 그녀가 아니라 딴 여자를 보러 가던 게 아닌 이상은요, 저는요 오로지 당신 생각만 하고 있었거든요, 그리고 그게 제가 모든 사람들을 부러워한 이유예요, 나도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지만, 확실한 건 그게 사실이란 거예요.

  제가 항상 창문가에 앉아 있는 건 제가 그냥 꼽추도 아니고, 양쪽 다리에 움직이기 불편한 관절염 같은 것까지 있는 바람에 거의 마비가 된 것 같아서 그래요, 이러니 이 집에 사는 사람들 모두한테 성가신 존재가 되고 있는 거죠. 모든 사람들이 나를 참고, 억지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걸 느끼는 기분이 어떤 건지, 당신은 상상도 못하겠죠. 그리고 어떤 때는 창문 밖으로 뛰어내리고 싶을 만큼 우울해지지만, 제가 어떤 꼴이 될지 상상을 해보세요! 게다가 제가 뛰어내리는 걸 보는 사람은 비웃을 테고, 창문이 너무 낮아서 죽지도 않을 거고, 그래서 더 심한 골칫거리만 될 거고, 내 모습이 눈에 선하네요, 길거리에서 원숭이처럼, 허공에 팔다리를 휘저으면서, 꼽추 등은 블라우스에서 튀어나와 있고, 사람들 모두 나를 불쌍히 여기고 싶어하지만, 한켠으론 역겹다고 느끼거나, 어쩌면 웃기도 하겠죠, 왜냐하면 사람들이란, 자기가 되고 싶은 사람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사람들일 뿐이니까.


  □ 결국 부칠 것도 아니라면, 전 왜 당신께 이 편지를 쓰고 있는 걸까요?(작가는 이 중간 부분을 공란으로 비워놓은 대신, 이 한 문장만을 써놓았다.)


  그렇게 여기저기를 다니는 당신은, 아무도 될 수 없는 존재가 된다는 게 사람을 얼마나 짓누르는지 짐작도 못하겠죠. 창문가에 하루 종일 앉아서 사람들이 오고 가고,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말을 걸어가며, 삶을 즐기고 있는 걸 보고 있으면, 나는 시든 잎사귀가 달린 화분이 된 것만 같아요, 창문가에 잊힌 채 버려진.

  당신이 잘 생겼고 건장하니까 상상도 못하겠죠, 우리처럼 태어나긴 했지만 사람은 되지 못한 게 어떤 건지를요, 신문을 통해서나 사람들이 뭘 하는지 보고, 어느 누구는 장관이라서 이 나라 저 나라로 온 세계를 누비고 다니고, 누구는 상류층에 속해서, 결혼을 하고, 세례를 받고, 병이 생기면 똑같은 의사들에게 가서 수술을 받고, 누구는 여기저기에 집이 있어서 옮겨 다니고, 또 누구는 훔치고, 다른 누구는 고소를 하고, 누구는 끔찍한 범죄를 저지르고, 누구는 자기에게 주어진 칼럼이 있고, 최신 유행 상품을 사러 해외로 다니는 사람들에 대한 온갖 사진과 광고,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이, 나처럼 갓 페인트칠한 창턱에 놓인, 화분에 물을 주고 남아 있는 동그란 물 자국을 훔칠 때 쓰는 것 같은, 그런 걸레 같은 존재한테는 어떤 건지, 당신은 상상도 못하겠죠.

  이 모든 걸 깨닫는다면, 어쩌면 당신도 이따금 나에게 손을 흔들어 안녕이라고 말을 건넬 수도 있겠죠, 그리고 전 바로 그걸 저에게 해줄 수 있겠냐고 당신께 묻고 싶었던 거예요, 왜냐하면 당신은 상상도 못하니까. 내가 더 살지 못할지도 모르고, 살아야 할 날들이 얼마나 조금 남았는지도 모르니, 하지만 혹시 난 당신이 나를 향해 손을 흔들어 아침 인사를 해주는 걸 보게 된다면, 다들 가는 그곳에 가게 될 때 더 행복하게 갈 수 있을 거예요.

  재봉사 마르가리다가 말해주기를, 그녀가 당신과 한 번 얘기한 적이 있는데, 당신한테 퉁명스럽게 쏘아붙였다고 했어요, 당신이 이 옆골목에서 그녀에게 추근대서 말예요, 그리고 전 이 얘길 들을 때만큼은 정말이지 부러워할 만하다고 생각했어요, 인정해요, 거짓말하고 싶지 않거든요, 왜 부러웠냐면, 누군가 우리한테 추근거린다면 그건 우리가 여자라는 뜻인데, 전 여자도 남자도 아니거든요, 왜냐하면 내가 창문가의 빈 공간이나 채우는 존재 이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날 보는 사람들 모두를 거슬리게 할 뿐이니까, 아 신이시여, 제발 좀.

  안토니우(그의 이름은 당신과 같은데, 얼마나 다른가요!), 정비소의 수리공 안토니우가 한번은 네 아버지에게 그랬대요, 모든 사람은 뭔가 생산해야 할 의무가 있고, 이걸 하지 않는 인간은 살 자격도 없다고, 일하지 않는 사람은 먹지도 말아야 하고, 일을 하지 않을 자격 같은 건 누구에게도 없다고요. 그 말을 듣고 난 내가 이 세상에서 뭘 하고 있는지 생각해봤어요, 난 겨우 창문 밖이나 바라보고 있구나, 사람들은 모두 여기저기로 오고 가면서, 몸에 마비된 데 하나 없이, 각자 좋아하는 사람들을 만나가며, 필요한 뭐가 되든 원하는 만큼 그걸 생산하는데, 그게 그들한테 좋은 걸 테니까.

  잘 있어요, 안토니우 씨, 저에게 남은 날들은 정해져 있네요. 그리고 저는 이 편지를 오로지 제 가슴에 품기 위해 썼어요, 마치 내가 당신께 쓰는 게 아니라 당신이 제게 쓴 것이라고 여기면서, 저는 당신께 제가 바랄 수 있는 모든 행복이 있기를 바라요, 그래서 비웃게 되지도 않기를, 그 이상은 바랄 수 없다는 걸 아니까.

  내 온 마음과 인생을 다 바쳐 당신을 사랑해요.

  여기까지 할게요, 저 온통 눈물이네요. 


                                                                                                                        192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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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산문선『페소아와 페소아들』 2014. 7. 31. 초판/ 2017. 2. 20. 3쇄 <워크롬 프레스> 발행

  * 페르난두 안토니우 노게이라 페소아(포르투갈 리스본 출생, Fernando Antonio Nogueira Pessoa, 1888-1935, 47세)/ 시인, 일생 동안 70개를 웃도는 이명異名 및 문학적 인물 등을 창조해 글을 썼다. 알렉산더 서치, 알레르투 카에이루, 알바루 드 캄푸스, 리카르두 레이스, 안토니우 모라, 토머스 크로스, 바롱 드 테이브, 헨리 모어, 마리아 주제 등 페소아가 창조한 이들은 포르투갈어와 영어와 프랑스어로 각기 다른 문체를 구사했으며 소설, 희곡, 평론, 편지, 일기 등 다양한 산문을 썼다. 잡지 『오르페우Orpheu』를 창간하고 주요 필자로 활동했으며, 모국어로 쓴 것으로는 유일한 시집 『메시지Mensagem』가 있고, 단상 모음집『불안의 책(Livro do Desassossego)』을 출간하려 했으나 실현하지 못하고, 이듬해 간경화로 생을 마쳤다.

 * 김한민/ 1979년 서울 출생, 『유리피데스에게』『혜성을 닮은 방』『공간의 요정』『카페 림보』『사뿐사뿐 따삐르』『도롱뇽 꿈을 꿨다고?』『그림 여행을 권함』『책섬』『비수기의 전문가들』등의 책을 쓰고 그렸다. 한국해외협력단(KOICA) 소속으로 페루에 파견되어 학생들을 가르쳤고, 독일에서 떠돌이 작가로 살다가 귀국해 계간지 『앤분의 일(n/1)』편집장으로 일했으며, 한겨레 신문에 '감수성 전쟁'을 연재하기도 했다. 지금은 포르투갈에서 가장 좋아하는 시인 페르난두 페소아의 글을 번역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