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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 파란』2019-겨울호/ 이슈(issue) : 대담

검지 정숙자 2020. 3. 3. 16:50




  『계간 파란』2019-겨울호             issue 대담




   지상의 마지막 대화/ - 정진규 시인과의 대담(발췌)__전형철 시인 

   전형철: 시인이 아닌 삶을 다시 선택하고 싶다면 무엇을 해보고 싶으신지요?

  진규: 아무리 생각해도 다른 재주는 없을 것 같아. 재주라면 재주인데 시 쓰는 것도. 다른 사람과 비교해 볼 때 시가 안 되는 사람도 있거든. 예술적 본능을 타고났다 생각해서 다른 일을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다시 해도 시일 것 같아

  전형철: 마지막으로 선생님께서 보고 계신 현 시단의 상황과 후배 시인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무엇인지요? 남기고 싶은 말씀과 조언을 부탁드립니다.

  정진규: 나이 먹으니까 잔소리가 나옵니다. 잔소리가 늘어. 걱정이 돼서 그런가 봅니다. 노파심에서. 보입니다. 우리 시단의, 넓게 봐서 우리 문단의 문제는 소중함을 모르는 것 같습니다. 서로를 대하는 모습도, 작품 자체를 운용하는 것도 그렇고. 그냥 하다가 말고 소중하게 소통하면서 서로 격려해 가면서 그 가치에 대해서 진중성을 가지고 가야 하는데 말입니다. 옛날 선비들로부터 내려오는 가장 중요한 자세는 섬기는 것 아닙니까? 선비와 선비 간에 섬기기도 해야 하지만 작품을 섬겨야지요. 너무 작품을 가볍게 생각하는 게 아닌가. 시 잡지 하나만 보더라도 뭐 우후죽순 격으로 많아. 많은데 운영 자체가 섬김의 자세가 아니고 세속적인 실리의 관계로 교류하는 시인들이 많지 않은가. 그런 모습을 봤을 때는 내가 싫어져요. 표정이 달라지고 표정이 달라지니 내가 외로워집니다. 내가 손해 보는 때도 많고, 작품에서도 같은 시인의 입장에서도 섬김의 자세를 진중하게 가졌으면 하는 생각을 합니다.(p.24-25)



    '오늘밤'이라는 미래의 시간/ - 신달자 선생님 인터뷰(발췌)__박미산 시인 

   박미산: 시인들은 깊은 한밤중에 시를 쓰는 경우도 있고, 저같은 경우에는 특별히 시간을 정해 놓고 쓰지는 않거든요? 책을 읽다가 혹은 어떤 사물을 만났을 때 영감이 번쩍 들어 쓰기도 하는데 선생님께서는 언제 시를 쓰시나요?

   신달자: 대개 새벽 5시부터 정오까지 시를 씁니다. 학교에 다닐 때 영감이 오면 학생들 출석부에도 썼어요. 그리고 앞 가에게 물을 사러 갈 때도 메모지를 늘 갖고 다녀요. 이건 아주 오랜 습관이에요. 언제든지 쓸 수 있게 전화기 옆, 화장실, 집 안 곳곳에 메모지가 있습니다. 기억력이 없어지니까 메모를 하지 않으면 시를 쓸 수가 없어요. 좋은 아이디어나 메모가 시가 되지 않을 때도 있고 별스럽지 않은 게 좋은 시가 됭 수도 있지만 메모는 꼭 합니다.

  박미산: 선생님께 부를 가져다준 소설과 에세이도 있는데 선생님께서는 1964년에 등단하셔서 50년 동안 계속해서 시를 놓지 않으셨습니다. 결국 선생님은 시를 택하신 것이지요. 어리석은 질문인지 모르겠지만 선생님께 시라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요.

  신달자: 벌써 등단 50년이 넘었어요. 중학교 시절부터 치면 50년이 넘죠. '시는 질투심이 많은 애인'입니다. 에세이나 소설을 쓰다 오면 시가 절대 안 받아줘요. 에세이나 소설을 버리고 나서 '나는 너밖에 없어' 하며 한참 기다려야 시가 와요. 시는 모든 것을 버려야 합니다. 시는 극심한 고통 아래에서도 안 되고 너무 사랑할 때도 시가 안 와요. 밥벌이할 때의 시는 고통스러우니까 나를 감추게 되고 결국 시가 관념적이 되더군요. 모든 것을 내려놓으니까 비로소 시가 되더라고요. 아이들이 크고 웬만큼 경제적으로 안정이 되었을 때부터 산문을 안 쓰고 시에 몰두했어요. 1999년 『아버지의 빛』을 출간했을 때 동아일보 어느 기자가 쓴 서평을 읽었습니다. 제 시집에 대한 서평 헤드라인이 '신달자의 시가 달라졌다'는 기사였어요. 그것을 지금도 잊지 못해요. 제 시에 대한 정확한 지적이었습니다. 모든 것을 내려놓으니까 시가 편해진 거죠. 결국 시를 위해 그동안 모든 것을 하지 않았나 싶어요. 박경리 선생님의 강의를 들은 적이 있었어요. 박경리 선생님은 "내가 결혼해서 잘살면, 그리고 지나치게 행복한 여자였다면 결코 소설가가 안 됐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어요. 결국, 문학은 완벽한 사람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결손이 힘이 되고 결손 감정이 문학을 하게 합니다. 결손 감정이 꺾이지 않는 힘이 문학입니다. 결국 시는 나의 모든 것입니다. (p. 37-39)



  시가 된 삶, 삶이 된 시/ - 천양희 시인 인터뷰(발췌)__이혜원 문학평론가 

   이혜원: 선생님께서는 어느 구절에선지 "시는 자연을 쓰는 서기다" 이렇게 말씀하셨는데 서기라고 하면 자연의 모습이나 소리를 그대로 받아 적는 것일 텐데, 선생님 시를 보면 서기라는 느낌보다는 자연 속에서 자신을 받아들이고 깨치는 수도자의 모습이 많이 나온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떤 연구자는 선생님 시를 불교적인 관점으로 접근하던데요?

  천양희: 그걸 나는 잘 읽어 냈다고 봐요. 왜냐하면 우리 집이 유학 집안이고 불교를 믿는 집안이었어요. 우리 할아버지가 출가까지 하시려고 그랬는데 못 하고 말았거든요. 그래서 항상 우리 할아버지는 사랑방에서 혼자 독경하시고 새벽 세 시 되면 나와서 사방 보며 합장하고 굉장히 맑게 사신 분이에요. 그런 할아버지한테서 내가 맑은 정신을 배웠어요.

  이혜원: 선생님의 시는 자연을 볼 때도 그냥 관찰의 시는 아닌 것 같아요. 계속 자신을 비추어 보면서 가다듬고.

  천양희: 그냥 관찰은 내 성에 안 차요. 그런 집안에서 자라서 그런지 내 생각 속, 내 마음 속에는 건방지게도 감히 절 한 채가 늘 들어 있는 거 같아요. 그리고 '시'라는 한자를 보면 언어로 지은 사원이잖아요. 내가 경전 읽는 걸 굉장히 좋아했어요. 불교 경전은 심오한 철학서 같아요. 그래서 불교 경전을 학문처럼 받아들이고 마음공부를 했어요. 나는 맑은 것에는 언제나 마음 심(心) 자가 들어 있다고 생각해요. 불심 할 때도 마음 심이 들어가죠. 동심 할 때도 마음 심이 들어가죠, 시심 할 때도 마음 심이 들어 가죠, 천심 할 때도 마음 심. 그래서 이 마음이 아무 데나 가는 게 아니더라고요. (p. 61-62)  



   '바리데기-되기'를 위하여/ - 강은교 시인의 시와 삶(발췌)__김지녀 시인 

  강은교  시인은 고백한 적이 있다. "시인도, 또 그럴듯한 다른 직업을 가진 사람도 사실 별스러운 존재가 아니다. 일종의 넓은 의미에서의 구두닦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라고. 강은교 시인은 최근, 국정 농단 사태로 불거진 문화 예술계 블랙리스트에 이름이 오르기도 했고, 세월호와 관련한 시를 발표하며, 여전히 현실에 참여하는 시인의 행보를 보이고 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선생님께 마지막으로 이런 질문을 드리고 싶었다.

  이 시대에 '시인'이란 누구입니까?


  "정말 어렵네요. 갈수록 어려워요. 그래도 한마디.

  '지금 여기, 또는 순간 과거가 되어 버리는, '없는 지금' 속에서 끝없이 미래를 언어로 사는 사람.'

  그러니 미학의 성취와 함께 현재적 성취가 한 지평에서 일어나는 시를 쓸 줄 아는 사람.

  어쩌면 가망 없는, 끝없는 미래의 언어로 선을 향하여 가는 사람

  예술의 마지막 지향점은 '선이 있는 곳'이라고 할 수 있겠죠.


  강은교 시인을 생각한다. 처음 눈이 마주쳤을 때의 선함에 대해, 선함 속에 내재된 시간에 대해, 선함을 온몸으로 밀고 가는 시인의 시와 시인의 목소리에 대해.

  여전히 시가 어렵다고 말씀하신다. 아마 시가 삶이기 때문일 것이다. 시에는 정답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시가 이미 때 묻은 언어를 사용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그 모든 어려움 속으로 뛰어들어 시가 되어 가는 사람. 말 그대로 시인詩人 강은교. 후배로서, 팬으로서, 앞으로도 오래오래 시 쓰기와 새로운 시집 활동을 기대한다.(p. 93-94)



  삽을 씻고 가는 물처럼/ - 정희성 시인 인터뷰(발췌)__신용목 시인 

  1980년대로 접어들면서 많은 상황이 바뀌게 되었다. 우선 '80년 광주'라는 현대사적 사건이 있었고, 그것을 계기로 민중들의 의식이 급격하게 성장했다. 이전까지 민중 현실에 관심을 가진 지식인들의 역할이 필요한 시기였다면, 이제는 본격적으로 민중들에 의한 민중문학이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었다. 말하자면, 시인은 황석영의 『객지』나 조세희의 『난쟁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 신경림의 『농무』나 시인의 『저문 강에 삽을 씻고』와 같은 작품들이 본격적으로 민중문학이 등장하기 전 단계에 자리한 지식인 문학으로 보았다. 노동자의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을 때, 더는 지식인이 노동자의 목소리를 대신할 필요도 대신할 수도 없다고 생각했다. 시인은 자신의 길을 조정하기 위해 13년이란 긴 시간을 통과했고, 1991년에야 세 번째 시집을 상재한다.


 『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에게』(1991, 창비)는 연시 형태를 띠고 있지만 남북 관계를 생각하며 쓴 시이다. 통일은 그것을 가로막는 모든 세력들과도 함께 실천할 수밖에 없는 사적 과정이자 삶 그 자체였다. 즉, 싸움과 대결만으로는 민족사적 문제를 넘어설 수 없다는 통찰이 그 바탕에 깔려 있다. 시인에게 오래도록 금기어였던 '사랑'이 새로운 의미로 재탄생한 것이다.


  시인은 이렇게 말한다.


 브레히트는 '서정시를 쓰기 힘든 시대'라고 말했지만, 시인은 언제나 서정의 힘을 믿어야 한다. 이론이나 논리로 누군가를 설득할 수 없다. 정서적 교감을 통과할 때만 우리는 누군가를 바꿀 수 있다. 2001년 한국을 방문한 바 있는 팔레스타인의 시인 마흐무드 다르위시는 "시가 세상을 바꾸어 놓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세상이 나를 바꾸어 버렸다"는 말을 했다. 그러나 시가 누군가의 마음에 아름다운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는 희망이 없다면 우리는 더 이상 시 쓰기를 그만두어야 할 것이다. (p. 110-111)



  ◈ 길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 문인수 시인과의 대담(발췌)__주영중 시인  

  "파킨슨 씨가 어느 날 내게 찾아왔어."

  문인수 시인이 담담하게 그러면서도 유머를 잃지 않고 말을 흘린다. 대구 수성구에 위치한 시인의 집을 찾았을 때, 시인은 소파에 앉아 살짝 기운 몸으로 나를 반갑게 맞아 주었다. 문학 행사 자리에서 가끔은 뵈었지만 가까이에서 인사를 드린 건 처음이었다. 파킨슨도 유사 파킨슨이라 치료가 쉽지 않다는 말을 자연스럽게 건네는 시인을 부축하고 가까운 카페로 자리를 옮겨 대담을 진행하였다. 우연히 찾아온 '파킨슨 씨' 때문에 『파란』의 대담 요청에 부담을 느끼기도 했다고 시인은 말했지만 막상 시와 삶에 대한 이야기가 시작되자 열정적으로 대담 속으로 몰입하기 시작했다.(p.119)


  죽음이라는 모티프 혹은 화두는 이 시집(『적막 소리』, 2012. 창비)은 물론 다른 시집들에서도 많이 편재되어 있는데, 죽음은 부재를 말하면서도 부재의 흔적을 강렬하게 거느린다는 점에서 존재를 말하는 또 다른 방식이라 판단된다.

  "어느 날 길 끝에서 만나는 죽음, 맞닥트리는 죽음. 나는 그저 비참이 슬픔이 거느리고 있는 죽음을 볼 뿐이다. 그래야만이 저 죽음에 빠지지 않고 객관적으로 죽음을 볼 수 있다. 그렇게 보면 길과 죽음은 만난다기보다는 길의 끝에서 맞닥트리는 그 무엇이지. 사물을 통해 죽음을 본다. 거대한 죽음이 아니라 주체가 거대할수록 가볍게 터치하자. 내가 죽음에 대해 쓸 때 갖게 되는 태도지. 어떤 시인의 시들을 보면 죽음에 대한 표현은 복잡하기 짝이 없고, 관념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은데, 설명 없이 정황이나 상태만 제시해야 죽음은 더 명징해지고 구체화되지." 

  끊임없이 길을 떠나는 것은 끊임없이 시를 찾아 나서는 여행일 것이다. 시가 찾아오길 기다리는 기다림이 아니라 시를 찾아 움직이는 것. 그 길 속에 시가 있다고 시인은 말한다.(p. 124)



   * 『계간 파란』2019-겨울호 <issue-대담>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