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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기옥_역사 인물과 인재 교육 『서초 이야기 · 2』 「정도전」

검지 정숙자 2020. 2. 19. 03:12

 

 

 

    혁명으로 이룬 민본주의

    정도전 

 

    강기옥 /시인, 칼럼니스트

 

 

  고려말 조선초의 정치가이자 학자인 정도전은 1392년 조준, 남은 등과 함께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한 조선의 일등 개국공신이다. 정도전의 묘로 추정되는 자리가 서초구청 뒷산에 있다.

 

 

  세월은 사람을 기다리지 않는다. 그러나 역사는 그 주인공을 기다린다. 어수선한 시기일수록 시대를 어거하는 출중한 인물이 나타나 권력의 중심이 되는 것은 바로 역사와 인물의 역학관계 때문이다. 다만 권력욕에 의해서든 민중을 위해서든 영웅으로 탄생하기까지의 과정에서 희생당한 자들 때문에 역사는 언제나 가정假定에 의해 아쉬운 이야기가 뒤따른다.

  서울 정도 600년 기념 행사에서 조선 건국의 역사를 새롭게 조명할 때 관심을 끈 것은 정도전(鄭道傳, 1342~1398, 56세)이었다. 허공을 나는 새는 반드시 두 날개가 있어야 하듯, 한 왕조의 건국에도 무력武力과 문력文力을 갖추어야 한다. 서슬 퍼렇던 고려의 무인정권과 왕씨를 몰아내고 새 왕조를 세우지 못한 것은 문의 이념적 뿌리가 없었기 때문이며, 송나라가 오랑캐의 침입을 막아내지 못하고 단명하게 끝나버린 것은 문을 숭상한 나머지 국가를 지탱해 줄 무의 날개가 온전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 역사적 사실을 꿰뚫어 본 정도전은 이성계의 무를 바탕으로 자신의 이념을 꽃피워보려 새 왕조 건설에 매진했다. 그래서 정도전은 이성계와 자신의 관계를 한고조와 장자방(장량)에 비유한다. 이성계와 정도전은 부패한 왕조를 멸하고 새 이념의 새 나라를 세우는 데 필요조건과 충분조건을 갖추었기에 도전이라는 이름 그대로 도전적으로 혼란기의 고려정권을 수습하여 역사의 주인공으로 떠올랐다.

  중국이 원명교체의 혼란한 시기를 당하자 고려에서는 신돈의 등장 이후 혼란에 빠져들었다. 기득권층이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신진 개혁층을 압박하며 대립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와중에 이임임의 친원 정책에 반대한 정도전은 나주로 유배당했다. 그곳에서 민초들의 처절한 삶을 목격한 정도전은 왕권보다는 신권을 중심으로 민본民本 정치를 해야 한다는 생각을 굳혔다. 그의 민본은 현장에서 얻은 정치철학이기에 절실하고 현실적이다. 그래서 자신의 생각을 펼치기 위해 힘의 바탕이 될 이성계를 찾았다.

  춘추전국시대의 중국이나 민족의 대이동으로 종족간의 갈등을 빚은 유럽이나 역사는 대부분 성공한 지도자의 이야기다. 더구나 후세들은 평화 시대의 지도자보다 혼란을 수습하고 새 세상을 연 지도자의 혁신적인 이념과 도전적인 정치행위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인다. 성공한 실패자나 실패한 성공자의 이야기에서 더 큰 교훈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고려와 조선으로 왕조의 변화는 단순하지만 천 년 이상의 긴 역사를 이어온 만큼 존경할 만한 인물도 많다. 그중 정도전은 수도 서울과 연계한 인물로는 단연 독보적인 존재다.

  1394년 11월 25일 일후 조선의 수도로 정한 이래 정종이 1399년 개경으로 천도했다가 태종이 1404년에 다시 한양으로 재천도하는 우여곡절을 겪기도 했으나 정도전은 조선의 맥을 이은 역사의 현장을 유교적 이념으로 설계하고 민본을 중시하는 신권정치의 이상의 틀을 조성했다. 경복궁의 설영設營과 전각 이름 등 그의 손길을 거치지 않은 것이 없고 조선의 헌법인 『경국대전』에 앞서 「조선경국전」을 정리하여 법치국가의 기틀을 다지기도 했기에 철저히 문의 날개를 완성했다.

  민본사상을 내세운 정도전의 신권정치는 왕권중심의 이방원과 대립할 수밖에 없었다. 요동정벌의 원대한 포부를 안고 종친까지도 군사훈련에 동원하며 사병을 혁파하려는 계획에 이방원과의 극한 대립을 보였다. 그런 중에 나이 어린 방석을 왕세자로 세우는 바람에 이숙번을 중심으로 한 군사를 동원하여 정도전 일파를 제거했다. '방석의 난', '방원의 난', '정도전의 난' 이라고도 하는 '제1차 왕자의 난'이다. 1398년 무인년에 종사宗社를 안정시켰다 하여 무인정사戊寅定社 또는 무인정변戊寅政變이라고도 한다.

  처음부터 이방원은 유신儒臣들의 견제를 받아 개국공신으로 책봉되지도 못했다가 태조 7년에야 추록될 정도로 견제당했다. 그에 대한 보복은 정도전 일파의 숙청이었다. 역적으로 목이 잘린 정도전은 어디에 묻혔는지 정확한 장소를 알지 못했다. 그런데 1656년 반계 유형원의 『동국여지지東國輿地誌』과천현편에 '鄭道傳墓 在縣 北東 十八里(삼봉 정도전의 묘는 과천현 북동쪽 18리)'라는 구절에 힘입어 서초구청에서는 학계의 자문을 받아 서초구청과 외교안보센터 사이의 양재고등학교 후문 쌈지마당(서초동 산23-1번지)으로 추정하고 그곳에 정도전의 민본사상을 기리는 빗돌과 묘터비를 세웠다. 민초를 생각한 조선 초기의 정치가 삼봉의 뜻을 살려 세 기념비도 세 봉우리로 장식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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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강기옥_역사 인물과 인재 교육 『서초 이야기 · 2』에서/ 2019. 12. 20. <한국문화원연합회> 펴냄

 * 강기옥/ 시인, 칼럼니스트. 시집 『그대가 있어 행복했네』등, 평론집 『시의 숲을 거닐다』『느림의 계단에서 읽는 시』, 인문교양서 『문화재로 포장된 역사』『국토견문록』, 칼럼집 『칼을 가는 남자』등, 한국문협문학유적탐사 연구위원장,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