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이혼을 결심하는 저녁에는 2 / 정혜영

검지 정숙자 2020. 1. 16. 16:42

 

 

    이혼을 결심하는 저녁에는 2

 

    정혜영

 

 

  끝이 보이지 않는 기차를 타고 소년은 지나가고 소녀는 앞치마를 벗어 머리 장식을 하고

 

  소녀는 남아 있네 복도가 긴 아파트 막다른 907호

 

  이건 아닌 것 같아 두 발이 엉킨 것 같아 소녀는 발레리나가 되는 꿈 속에서

  발을 동동 구르고

 

  진바지와 청바지의 무릎이 찢어져서 너덜너덜

  완벽한 달력 그림처럼 우린 삼 년밖에 같이 못 살 거야

 

  막다른 골목에서 너는 죽일 듯이 내 목을 누르고 내게는 아직도 목숨이 세 개 있고

 

  그건 마치 전생에 있었던 일

  골목은 막다른 골목 담장 위엔 고양이 눈동자

 

  기시감 따윈 무시해도 되는 줄 알았지

 

  수만 년의 빙하와 크레바스가 여자와 남자를, 알면서도 모르는 사람을 발굴하고

 

  소년은 소녀를 영영 모르는 채 블랙홀을 하나씩 키우고 있지 여길 떠나면 달라질까 로마에서 보자 나를 보러 꼭 놀러와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지도 몰라 ET가 된 것 같아 베트남에서 자리 잡을지도 몰라

 

  누가 누구에게 빛을 주고

  그 빛은 어디서 생겨나는지 까마득하고

 

  분명히 섬망의 순간이었던 것 같기도 하고

  하얀 말이 뛰어노는 인드로메다의 푸른 목장이 어디엔가 있는 것 같기만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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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층』 2019-겨울호 <젊은 시인 7인선>에서

   * 정혜영/ 2006년『서정시학』으로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