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변종태_ 십인십색(十人十色)의 노랫소리(발췌)/ 달, 저녁 : 박해림

검지 정숙자 2020. 1. 16. 02:52

 

<2019, 계간『다층』이 선정한 올해의 시집 best two> 中

 

 

    달, 저녁

 

    박해림

 

 

  엄마는 늘 불을 끄셨네

  설거지를 하면서 불을 켜지 않았네

  어둠 속에서 무얼 하나 몰라

 

  그릇들이 어둠을 삼켜도 어둠은 줄어들지 않았네

 

  엄마는 늘 불을 켜지 않았네

  불이 어둠에 빠질까 걱정되었을 것이네 그리하여

  딸깍, 딸깍 방이 꺼지고

  딸깍, 딸깍 마루가 꺼지고

  딸깍, 딸깍 부엌이 꺼졌네

 

  붉은 창호지에 번진 엄마의 눈빛이 형광등보다 밝은 것을 그때 처음 알았네

 

  엄마는 늘 불을 멀리 밀어놓으셨네

  60촉 백열전구도 눈이 시려 30촉으로 바꿔놓으셨네

  마침내 전구가 나갔을 때, 몰래 품속의 달을 켰네

 

  달빛이 스러지고

  엄마의 눈빛이 스러지고

  마침내 밤이 스러질 때

  달그락, 달그락 부엌이 일어나 혼자 어둠을 켰네

 

  아버지는 이날도 돌아오지 않으셨네

    -전문, 『오래 골목』(시와소금, 2019) 

 

 

  ▶ 십인십색十人十色의 노랫소리(발췌)_ 변종태/ 시인

  올해도 본지에서는 올해의 좋은 시집 두 권과 올해의 좋은 시 10편을 선정하고, 해당 시인들의 동의를 얻어 소개하고, 그들의 시를 통해, 독자(시인)들이 어떤 경향의 시를 선호하는지를 확인하는 작업을 진행하였다.(P-17) 

 

  인간은 길에서 태어나고, 길에서 살다가 길에서 죽는다는 말이 있다. 모태에서 태어나는 순간 지나온 산도産道부터 길이고, 그 길의 끝에서 빛을 보고, 길을 거쳐 생활 공간을 오가며 살다가, 결국은 길을 통해 이 세상과 하직하게 된다. 눈에 보이는 길이든 눈에 보이지 않는 길이든 인간에게는 길이 강요되었고, 그것은 곧 인류 문명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박해림의 『오래 골목』을 읽다 보면 수많은 종류의 유무형의 길들을 만날 수 있다.애초에는 길이 없던 공간에 많은 사람들이 오가면서 길이 생기고, 앞서간 사람들의 흔적을 따라 다시 뒤의 사람들이 그 길을 걷는다. 여기에 박해림 시의 공간이 열린다. 시집의 제2부를 구성하고 있는 '오래 골목' 연작 14편의 시들은 이러한 길(골목)에 대한 진지한 탐구와 모색을 보여준다. "처음부터 골목이었다./ 문득 돌아보니 골목이 되어  있었다"(『어머니 - 오래 골목 14』에서) 는 진술은 구체적 공간으로서의 길이 이상적 공간을 지향함을 발견할 수 있다. 삶에 대한 상징으로서의 '골목'은 우리들 삶의 공간이자 터전이 된다는 점을 의미한다.(P-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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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층』 2019-겨울호 <기획특집_2019 올해의 좋은 시집/ 총평>에서

  * 박해림/ 1996년『시와시학』으로 시 부문 등단, 2001년《서울신문》《부산일보》신춘문예 시조 부문 1999년『월간문학』동시 부문 당선, 시집『오래 골목』등, 시조집『못의 시학』등, 동시집『간지럼 타는 배』, 시평론집『한국서정시으 깊이와 지평』, 시조평론집『우리 시대의 시조 우리 시대의 서정』

  * 변종태/ 시인, 본지 주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