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조대한_두 번째 걸음(발췌)/ 파라노이드 : 한재범

검지 정숙자 2020. 1. 1. 02:47

 

 

    파라노이드

 

    한재범

 

 

  해변에 집을 지었다

  파도가 그것을 무너뜨리기까지

  절벽에 앉아 있었다

 

  이곳에는 이미 나보다 먼저 온 사람이 있었다 그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내게 소리친다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말라고, 그가 악을 지르는 소리 점차 희매해진다

 

  해변 위를 바라보면

  무언가 새겨지기도 전에

  무언가 사라진다

 

  매일 그런 걸 보고 살아요

 

  잿빛 태양이 바다에 잠길 때

  파도처럼 산산이 부서지는 작은 빛들을

  그 사이를 눈먼 어둠이 지나가는 일을

 

  생각을 멈추지 마세요

  오늘은 더 멀리 가야 해요

 

  그런 걸 본 적도 있죠

  지뢰를 밟은 채 울고 있는 소년이

  이건 내가 오래전에 살던 집이었어요,

  금방이라도 발이 날아갈 것처럼 이야기하던 것

 

  다들 자기 집이란 게 있다고 생각하죠

  돌아가지도 못할 거면서

 

  아까부터 자꾸 귀가 간지럽네요

  무언가 밀려오고 있군요 부서지고 있는 겁니다 발소리 같네요 사람인가요 파도입니다 거짓말 마세요 그렇게 자신을 속이지 마세요

 

  알았으니 이제 제발

  닥치라고,

  그건 

  내가 소년에게 하고 싶던 말이었다

 

  소년이요? 네 아까 말한 그 소년이요

  자기가 밟은 그림자를 지뢰라고 착각한

 

  집이라고 하지 않았나요

 

  다른가요?

 

  무언가의  발소리

  무언가 깨지는 소리

  무언가 무언가를 깨트리는 소리

 

  저기 해변을 걷는 사람들을 보세요 있을 거예요 분명

 

  피를 한가득 흘리고 있나요

  그것이 파도에 실려 떠나가는 것을 보고 있겠죠

 

  파도 너머를 본 적 있어

 

  우리 그저 걸었지

  우리 그저 시커먼 바다

  바다는 깊고 바다는 보이지 않는다

 

  빛이라는 건 존재하지 않는다는 듯이

 

  그 속을 들여다볼수록

  모든 게 끝났다고 믿고 싶어졌는데

  언젠가 나누던 대화

  파도가 발생하는 곳은

  세계의 한 가운데일 거라고

  모든 것을 밀어내고 나면

  무엇이 남겠냐고, 무엇이

  되어버릴 것 같냐고

  바다는 끝에 다다르자 깨져버리고 만다

  파도의 역할을 마침내 바다가 해낸다

  기뻐, 기쁜데

  깨진 바다 속을

  왜 자꾸 들여다봐요

  벽을 두드리는 시선

  긴 막대기로 해변의 어둠을 들쑤시는 아이들 시커먼 앞에서 한 아이가 눈을 감는다 지뢰가 터진다 잔해를 덮는다

  무너지듯

  쏟아져 내리는

  잠깐의 빛

  파도가 벽을 짓는다

  파도가 벽을 부순다

  파도가 벽을 짓는다 

  다시 파도가

 

  파도

        -전문-

 

 

   ▶ 두 번째의 걸음 (발췌)_ 조대한/ 시인, 문학평론가

 「파라노이드」라는 시편을 보면, 해변에 집을 짓고 살아가는 '나'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그런데 내가 지은 집은 밀려오는 파도에 밀려 부서지거나 무너져 내리곤 한다. '무언가 새겨지기도 전에/ 무언가 사라지"는 해변 위의 흔적처럼, 나는 곧 무너질 기억의 구조물을 반복하여 짓고 또 허무는 듯싶다. 그리고 나의 집짓기와 나란히 놓여 있는 한 '소년'의 이갸기가 있다. 소년은 "지뢰를 밟은 채 울고 있"다. 발을 떼면 언제라도 지뢰가 폭발할지 모르니까, 소년은 그곳에서 걸음을 떼지 못한 채 금방이라도 발이 날아갈 것처럼 울고만 서 있다. 하지만 소년이 밟고 있는 것은 그저 그림자에 불과했고, 그는 "자기가 밟은 그림자를 지뢰라고 착각"을 했을 뿐이었다. 이렇게 보면 '나'와 '소년'은 하나로 겹쳐지는 듯싶기도 하다. 이내 부서져버릴 집터에서 고집스레 머무르는 나와, 큰일이라도 날 것처럼 작은 그림자 곁을 떠나지 못하는 소년은 서로 크게 다르지 않은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이들은 이미 모두 끝나버린 것, 깨져버린 것, 사라져가는 것에 매어 있는 것 같다./ 내용 못지 않게 인상적이었던 것은 이 시편의 호흡 내지는 형식이었다. 이 작품은 해변으로 다가오는 파도의 거리감에 맞추어 발화의 호흡, 행 길이의 강약을 조절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파도가 벽을 짓는다/ 파도가 벽을 부순다/ 파도가 벽을 짓는다// 파도" 등의 연이은 문장들은 소리 내어 읽을 때, 그 원근감이 보다 명료해진다. 한 번의 파랑이 들이치고 나가면 해변 위의 흔적은 깨끗이 쓸려 없어지고, 새로운 기억이 다시 시작될 것이다. 하지만 시인은 그 소거에 순응하진 않는 듯하다. 그는 무언가가 사라질 때 그 존재가 완전히 소멸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p.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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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대시』2019-11월호 <2019년 등단 신인 특집/ 신작시 읽기 2> 에서

  * 한재범/ 2019년『창작과비평』으로 등단

  * 조대한/ 문학평론가, 2018년『현대문학』으로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