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파블로프의 소년/ 한재범

검지 정숙자 2020. 1. 1. 03:03

 

 

    파블로프의 소년

 

    한재범

 

 

  늘어진 침묵을 목에 맨 채 소년은 늙어가고 있다

 

  소년은 자신의 개를 사랑했으므로

  소리도 없이 죽어버린 그것을 껴안아

  옆집 굴뚝에 버리고 왔다

 

  숨이 멎은 개의 몸이 빈 상자처럼 크고 가벼웠다 시커먼 연기 치열하게 피어오르는 굴뚝에 개를 묻고 남은 얼굴마저 묻어버리고 싶었는데

 

  문득 두 손을 쥐면

  손금 사이에 울컥 땀이 차고

 

  죽은 화초들로 둘러싸인 거실

 

  소파에 누운 소년 위로 드리우는 저녁의 천장 죽은 날벌레들이 전등에 남은 빛을 갉아먹고 있다 정적이 집을 감쌀수록 깊어지는 그늘의 맛

 

  꿈속의 개는

  단 하나의 표정으로 죽어간다

  다른 말 같은 건 할 줄 모른다는 듯이

 

  죽는다는 건 왠지

  모조리 끝나는 것과 다르다는 생각

  천장에 눌러 붙은 아버지의 구두자국 

  보일러의 희망온도를 올리듯

  소년이 더운 꿈을 꾸게 한다

 

  꿈에선 아버지가 소년의 머리를 쓰다듬고

  무섭지만 다정한 얼굴로 사랑한다고 말한다

 

  헐떡이다 잠에서 깼을 때 소년은 여전히 소파 위에 있다 현관을 바라보며 짖던 개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돌아보면 죽어 있던 화초처럼

  자신도 모르는 자신이 곳곳에 서 있다

 

  물 바깥의 어부가 그물을 끌어올리듯

  누군가 빛을 거두어가고 있는 방안

  소년은 못처럼 앉아 있다

 

  빈자리가 날카로워지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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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대시』2019-11월호 <2019년 등단 신인 특집/ 신작시> 에서

  * 한재범/ 2019년『창작과비평』으로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