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황정산_ 투명함에 대하여(발췌)/ 가을이 올 때 : 박형준

검지 정숙자 2019. 12. 31. 13:42

 

 

    가을이 올 때

 

    박형준

 

 

  뜰에 첫서리가 내려 국화가 지기 전에

  아버지는 문에 창호지를 새로 바르셨다

  그런 날, 뜰 앞에 서서 꽃을 바라보는 아버지는

  일년 중 가장 흐뭇한 표정을 하고 계셨다

  아버지는 그해의 가장 좋은 국화꽃을 따서

  창호지와 함께 바르시곤 문을

  양지바른 담벼락에 기대어 놓으셨다

  바람과 그늘이 잘 드나들어야 해

  잘 마른 창호지 바른 문을 새로 달고

  방에서 잠을 자는 첫밤에는

  달그림자가 길어져서

  대처에서 일하는 누이와 형이 못 견디게 그리웠다

  바람이 찾아와서

  문풍지를 살랑살랑 흔드는 밤이면

  국화꽃이 창호지 안에서 그늘째로 피어나는 듯했다

  꽃과 그늘과 바람이 숨을 쉬는

  우리집 방문房門에서,

  가을이 깊어갔다

   -전문-

    

 

  ▶ 투명함에 대하여 (발췌)_ 황정산/ 시인, 문학평론가

 창호지는 우리창의 투명함과는 그 느낌의 거리가 큰 투명함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투명하다기보다는 흐릿한 반투명이라 말하는 것이 옳다. 하지만 유리창의 투명함은 차가운 투명함임에 반해 창호지의 반투명함은 따뜻함을 간직하고 있다. 유리창의 투명함은 안과 밖을 확실히 경계 짓고 오직 시선으로만 타자를 확인하는 냉혹한 투명함이다. 이에 반해 창호지는 비록 유리창의 투명함을 가지고 있지 못하지만 유리창과는 달리 공기와 소리를 투과시킨다. 시인은 그것을 "꽃과 그늘과 바람이 숨을 쉬는/ 우리집 방문"이라고 아름답게 묘사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창호지의 반투명은 유리창의 투명함에 비해 훨씬 더 인간적이고, 사람들의 소통을 가능하게 한다는 점에서 어찌 보면 더 투명한 것인지도 모른다. 시인은 이 창호지의 투명함으로 헤어져 있는 누이와 형과 소통하고 가족 간의 든든한 유대를 확인한다. 이렇듯 박형준 시인이 추구하는 투명함은, 나를 감추고 나와 타자를 구별하는 장벽을 없애는, 소통과 사랑의 투명함이라 할 수 있다.(p.165-1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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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네르바』2019-겨울호 <신작 소시집/ 작품론> 에서

 * 박형준/ 1991년 《한국일보》신춘문예 당선, 시집『나는 이제 소멸에 대하여 이야기하련다』『빵냄새를 풍기는 거울』『불탄 집』등

 * 황정산/ 1992년『창작과비평』으로 평론 활동, 2002년『정신과표현』에 시 발표로 작품 활동, 저서『주변에서 글쓰기』『쉽게 쓴 문학의 이해』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