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장석원_ 이미지 파랑 위로 날아오른...(발췌)/ 양철지붕에 대한 추억 : 최동호

검지 정숙자 2019. 12. 31. 01:30

 

 

  <2019, 제15회 김삿갓문학상 수상자 대표시> 中

 

    양철지붕에 대한 추억

 

    최동호

 

 

  빗소리는 듣는 것이 아니라 보는 것이었다

  중학생 시절 팔달로

  양철 지붕 집 대청마루에서

  멀리서 오는 어둠 속 빗소리를 듣고 있었는데

 

  선잠 들어 있던 내 몸 위로

  한 장 담요처럼 어둠이 덮여와

  눈꺼풀 감은 채

  그냥 빗소리를 보고만 있었다

 

  듣는 것이 아니라 빗소리를 처음 보았던 날

  눈감은 채 바라본 어스름한

  빗소리는 젖지 않은

  내 귀 속으로 가늘게 흘러들어

 

  대청마루를 지붕 위로 떠오르게 하였는데

  한 장 담요 밑에 들린 나는

  지상의 빗소리가 잿빛 문 안으로

  들어가는 뒷모습을 천장에서 바라만 보고 있었다.

    -전문-

 

 

   * 심사위원: 문효치  유승우  유성호 

 

 

  ▶ 이미지 파랑 위로 날아오른 『제왕나비』(발췌)_ 장석원

  소리가 "듣는 것이 아니라 보는 것"이라는 파격적인 진술로 시작하는 시이다. 아이에서 "중학생 시절"의 소년으로 시의 주체가 성장했다. 시인은 옛집 "양철 지붕 집 대청마루에서" "어둠 속 빗소리를 듣고 있"다. 빗소리는 "멀리서 오는" 것. 비를 따라 기억이 다가온다. 중학생 시인이 "선잠 들어 있"다. 그의 "몸 위로/ 한 장 담요처럼 어둠이" 내려온다. 어둠 담요가 그를 덮는다. 무거운 어둠에 눌려 혼몽에 빠진다. "눈꺼풀 감은 채", 어둠을 몸 위에 그대로 올려둔 채, 어둠의 무게를 절감하면서, "그냥 빗소리를 보고만 있"다. 바로 그날이었다. 사위를 에워싸는, 몸에 들어차는, 빗소리가 "듣는 것이 아니라" 보는 것임을 깨달은 그날, "빗소리를 처음 보았던 날", 그 "빗소리는 젖지 않은/ 내 귀 속으로 가늘게 흘러들"었다. 그 빗소리 지금도 살아 있다. 시인의 영육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그날은 지워지지 않은 것이다. 그날의 감각이, 그날의 이미지가, 살아서 꿈틀거린다. 영생하는 이미지. 주체의 죽음 이후에도 시 속에 남겨지는 이미지. 시인의 '추억' 속에 기록된 이미지. 낯선 두려움. 근원을 알 수 없는 공포. 시인은 환상을 그려낸다. 그날의 빗소리가 "대청마루를 지붕 위로 떠오르게 하였"다. "한 장 담요"에 실려 대청마루 따라 공중에 "들린 나는/ 지상의 빗소리가 잿빛 문 안으로/ 들어가는 뒷모습을" "천장에" 붙어 "바라만 보고 있었다." 귀기鬼氣 서린 기억이다. 낮잠에 침몰되었다가 선뜻 깨어났을 때, 시간이 사라지고, 공간이 압착된 듯한 공포에 젖었던 경험. 누구나 한 번쯤 겪었을 법한 서늘한 추억. 시인이 그 안에서 끄집어내어 독자에게 보여준, 징그러울 정도로 섬뜩한, 솜털이 곤두서는, 그날 우리가 체험한 두려움. '혼자'라는 것. 아무도 곁에 없다는 것. "지상의 빗소리가 문 안으로" 빨려드는 광경을 목격한 시인은 기습한 기억 앞에서 모골이 송연한 두려움에 포박된다. 그날처럼, 그날의 외톨이 '나'처럼, 오늘의 '너' 역시 비슷한 상황에 내던져진 것은 아닌가. 시인의 추억을 장악한 이미지는 그날의 공포를 재현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듣기와 보기가 전도된다. 정직하게 받아들이기 위해, 익숙하지만 두려운 낯설음인 외로움을 관류貫流하기 위해, 그는 꼿꼿하게 바라본다. 독자에게 주어진 이미지가 그 증거이다. 이미지는 시의 심장이다. 이미지는 언어로 표현된 것의 가장 일반적인 형상이다. 이미지가 양철지붕에 떨어지던 빗소리를 상기시킨다.(p.3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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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네르바』2019-겨울호 <제15회 김삿갓문학상 수상자/ 대표시/ 작품론> 에서

  * 최동호/ 1948년 경기 수원 출생, 1976년 시집『황사바람』으로 시 부문 & 1979년 《중앙일보》신춘문예로 평론 부문 & 1979년 『현대문학』으로 평론 부문 추천 완료, 시집 『황사바람』『아침책상』『제왕나비』등

  * 장석원/ 2002년《대한매일(현 서울신문)》신춘문예 당선, 시집『아나키스트』『역진화의 시작』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