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강적들/ 이화은

검지 정숙자 2019. 12. 31. 01:43

 

    강적들

 

    이화은

 

 

  늙은 가위처럼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는 지금쯤 즐겁게 차를 마시고 있을 것이다

  그녀는 웃을 때도 표정이 없다 없는 표정으로 울기도 한다

 

  아무도 그 얼굴에서 예감을 읽을 수가 없다

  천기가 누설 되어야 비가 내리고 풀이 자라는데

 

  보안이 철저한 저 표정에게 어떤 화려한 무기도 이길 수가 없다

  무표정은 그녀의 국가이고 그녀의 막강한 자산이다

 

  무표정이 번지고 있다 빠른 속도로

  우리가 열심히 겨울을 읽고 있을 때 기습적으로 봄이 왔다

 

  줄장미의 붉은 이빨이 벌써 폭염을 씹고 있다

  그녀의 무표정 때문이다

 

  이빨을 드러낸 맹수보다 밀림의 우거진 적막이 더 무서운 이유다

  젊은 엄마의 죽음 앞에서 활짝활짝 웃는 딸의 표정을 읽을 수도 해석할 수도 없었다

 

  표정에도 해설과 번역이 필요한 시대이다

 

  한국의 베란다에서 여러 해 쉬지 않고 꽃을 피우는 서양란의 표정을

  오늘 비로소 읽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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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네르바』2019-겨울호 <신작시> 에서

  * 이화은/ 1991년『월간문학』으로 등단, 시집『절정을 복사하다』『미간』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