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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정미_역사소설 『도공 서란』(부분) : 천추태후와 정병

검지 정숙자 2019. 12. 30. 18:54

 

 

  <손정미_역사소설, 천년의 빛깔 청자를 빚은 소녀 『도공 서란』p. 210~216>

 

    천추태후와 정병

 

    손정미

 

 

  무애는 서란과 마례를 강감찬에게 데리고 갔다.

  "솜씨가 좀 나아졌는가?"

  "좋아지긴 했습니다만……."

  마례는 유난히 얼굴이 핼쑥했다. 강감찬이 뚫어지게 바라보는 통에 서란은 얼굴이 붉어졌다.

  "이제부터는 오직 하나만 구워라."

  "네?"

  얼떨떨해진 서란이 강감찬을 쳐다보았다.
  "청자장구를 굽도록 해."

  "네? 청자장구 말입니까? 한 번도 구워본 적이 없습니다만."

  "매우 중요한 장구이니 목숨을 다해 명기를 만들도록 해라."

  "네, 명심하겠습니다."

  "시간이 없다. 겨울이 오기 전에 반드시 최고의 청자장구를 만들어야 한다."

  "네 나리!"

 

  마음이 급해진 서란은 그 후로 밤을 새는 날이 많았다. 기형이 부드럽고 예쁘게 나오면 색이 나빴고, 발색이 좋으면 기형이 비뚤어졌다. 색도 좋고 기형도 곧으면 이번엔 재가 튀어서 흉하게 되었다.

  "색이나 기형보다 더 중요한 것은 너의 영과 혼, 마음이 담긴 청자를 구워내는 일이다."

  '어떻게 해야 기가 느껴지는 청자를 구울 수 있을까.'

  서란의 마음은 점점 조급해졌다.

  마례는 요즘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는 일이 잦았다. 유난히 창백한 얼굴이었다.

  "하늘에 별이 많지?"
  서란은 그제야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매일 밤 오래도록 밤하늘의 별을 응시하느라 밤이슬에 몸이 상했는지 마례는 부쩍 기침을 했다.

  "별의 기운을 담아야 제대로 구워낼 수 있어. 그건 하늘이 도와주시는 거란다."

  마례의 목소리가 어쩐지 낯설게 느껴졌다.

  "조금만 더 하면 될 거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네 속에 있는 욕심을 거둬내야지."

  "저는 욕심이 없습니다……. 전에는 집채만 한 욕심이 가득했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미움과 원망, 분노도 거둬내야 한다."

  '미움과 원망, 분노…….'

 

  마례는 며칠째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점점 나빠지고 있잖아요. 제가 약을 구해올게요."

  며칠 사이 마례는 놀랄 정도로 눈이 퀭해졌다.

  "뭘 구하러 간다고 며칠 비운 적이 있었지? 약을 구하려 간 거였다. 이젠 필요가 없구나."

  "제가 다른 약을 구해올게요."

  마례는 힘없이 손을 저었다.

  "란아, 청자를 가르쳐준 사람이 누구였느냐?"

  "제 아버지요? 성함이 '서'자, '인'자, '청'자이옵니다."

  서란의 손을 꽉 쥔 마례는 눈물을 흘렸다.

  "왜 그러십니까, 여사님?"

  "이리 오렴, 우리 아가. 한번 안아보자꾸나."

  "네? 뭐라고 하셨어요?"
  "아가……, 우리 아가……."

 

  목종 4년(1000년), 천추황태후는 잠에서 깨자마자 아들 왕송에게 달려갔다. 간밤 꿈에서 청자로 만든 정병을 얻었는데 주변 나라들이 모두 엎드려 절을 올리고 아들 왕송이 천하의 지존이 되는 꿈이었다. 항태후는 왕송에게 신비스런 정병을 만들면 하늘의 보호로 천하제일의 지위를 누릴 수 있다고 했다.

  "이 세상 최고의 청자정병을 만들라."

  다시없을 효자인 왕송은 전국 자기소에 정병을 만들어 바치라는 명을 내렸다.

  탐진(강진) 자기소의 사기장은 개경에서 전해진 소식에 흥분했다. 정병이 채택되는 자는 개경으로 불러 벼슬을 준다는 것이었다. 도공이 개경에서 벼슬을 얻다니, 평생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기회였다.

  '내 아들 인청이가 만든 정병이 뽑힐 것이다!'

  사기장은 산골짜기마다 피어오르는 연기를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진척들이 새끼줄로 단단히 묶은 청자다완과 청자접시를 조심스레 싣고 있었다. 검수관은 세심히 청자를 살피며 등급을 매겼다.

  "쓸 만한 것들이 많이 들어왔당가?"

  사기장은 신이 나서 들뜬 목소리를 억누르며 짐짓 물었다.

  "이거 괜찮네!"

  검수관이 집어 든 것은 음각한 모란 넝쿨무늬 주자와 식지않게 주자를 담는 승반承盤이었다. 주자 안의 물이나 술을 따뜻하게 유지해주는 승반은 커다란 연꽃 모양으로 만들어져 마치 연꽃 안에 주자가 피어나듯 여유가 있으면서도 멋스러웠다. 세밀하게 새긴 모란이 여름날 흐드러지게 핀 자태로 청자에 담기니 마치 시원한 물속에서 흔들리고 있는 듯했다. 흐르듯 선이 곱고 수려해 깊은 계곡의 맑은 물을 보는 느낌이었다. 탐진에서 손꼽히는 도공이 만든 청자들이었다.

  "이걸 한번 보시오."

  옆에 있던 검수관이 들고 온 투각 칠보무늬 향로는 음각과 양각, 투각이 제각각 두드러지면서도 조화를 이루었다.

  둥그렇게 올린 향 피우는 화로는 앙련(꽃부리가 위로 향한 연꽃무늬)을 연상케 하는 국화잎 장식이 전체를 감싸고 있었다. 작디작은 토끼 세 마리가 앙증맞게 받침을 떠받들고, 뚜껑 위에는 다복과 장수를 기원하는 전보錢寶를 교묘하게 투각한 것이었다. 이국적이면서도 균형미가 겸비된 청자로 마치 연꽃 향이 풍길 듯했다.

  "잘 나왔네!"
  검수관이 도공의 솜씨에 혀를 내두르며 탄복하는데 누군가 헐레벌떡 뛰어왔다. 투각 칠보무늬 향로를 만든 도공이었다.

  "아이고! 나 좀 보랑게요!"

  도공은 뛰어오느라 땀을 잔뜩 흘렸다.

  "아, 그. 그거 좀 내놓으랑게요."

  도공은 검수관이 든 향로를 가리켰다.

  "왜 그러나?"
  검수관은 향로를 두 손으로 꼭 쥐며 물었다.

  "각이 맘에 안 들어부러. 가서 깨버릴랑게."

  "뭐라고? 괜찮은데 뭘!"

  "아따, 맘에 영 안 든당게."

  "개경으로 갈 물건이다."

  "그랑께 더 안 되지. 아이고, 참말로 어서 내놓으랑게요."

  "괜찮다니까."

  "내가 안 된당게요."

  "거참 성질머리하곤."

  마지못해 향로를 내놓은 검수관은 도공이 씩씩거리며 사라지자 혀를 찼다.

  고려의 도공들은 마치 내일이 없는 것처럼, 다음 청자는 없는 것처럼 하나하나에 모든 걸 쏟아냈다. 그래서 가마가 끝나면 탈진하는 이들도 많았다.

  송이나 거란 상인들은 고려청자를 탐냈지만 도공들이 하나하나에 온갖 정성을 쏟아붓는 바람에 공급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했다. 송나라 가마처럼 청자를 많이 만들어내면 얼마든지 갖다 팔 텐데 고려 도공들은 참 이상한 족속들이라며 혀를 찼다.

  고려 도공들은 청자 빚는 업을 하늘이 내려주신 일이라 생각했다. 신명에 따라 하는 일이기에 모든 것을 걸지 않을 수 없었다.(p. 210-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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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정미 역사소설/ 천년의 빛깔 청자를 빚은 소녀『도공 서란』에서/ 2019. 9. 16. <마음서재> 펴냄

* 손정미/ 서울에서 태어나 연세대학교 영문학과를 졸업했다, 1999년 《조선일보》에 입사해 문화부, 사회부, 정치부, 산업부 기자로 활동했다, 사회부 경찰 출입 기자로 사건 · 사고 현장을 취재했으며, 조선일보의 첫 정치부 여기자로 여야 정당을 출입했다.

  문학 담당 기자 시절 고 박경리 선생으로부터 소설을 써보라는 권유를 받고, 어린 시절부터 꿈꿔온 소설가가 되기 위해 2012년에 신문사를 나왔다. 그리고 2년 뒤, 삼국통일 직전의 경주를 무대로 한 첫 역사소설 『왕경 王京』을 발표했다. 이어 고구려의 위대한 영웅이자 세계사적으로 거대한 족적을 남긴 광개토태왕을 심도 있게 연구해 2017년에 장편 역사소설 『광개토태왕』을 출간했다.

  치밀한 고증과 문학적 상상력으로 역사의 한 장면을 생생하게 그려온 작가는 신라-고구려에 이은 역사 3부작으로 고려시대를 배경으로 한 이 소설을 완성했다. 『도공 서란』에서 그는 고려창자를 빚은 도공들의 예술혼과 거란의 침입에 맞섰던 강감찬의 귀주대첩을 실감나게 그려 고려의 활력과 자신감을 우리 앞에 펼쳐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