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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정미_역사소설 『도공 서란』(부분) : 하늘에 새겨진 장구 소리

검지 정숙자 2019. 12. 30. 19:52

 

 

<손정미_역사소설, 천년의 빛깔 청자를 빚은 소녀 『도공 서란』p. 305~309(終)>

 

 

    하늘에 새겨진 장구 소리

 

    손정미

 

 

  "강감찬 장군이시다!"

  "와!"

  "어디?"

  "강 장군이라고? 나도 볼라요!"

  "선랑들도 보인다!"

  강감찬 장군의 개선 행렬을 보러 나온 사람들이 거리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피리와 꽹과리, 징을 치며 선두에서 행진하는 악대 뒤로 늠름한 고려 군사들이 들어섰다. 융복(군복)은 갈가리 찢어지고, 먼지와 피를 잔뜩 뒤집어썼으며, 풀어진 머리를 대충 묶은 그들은 상처투성이였지만 승리를 머금은 눈에서는 빛이 났다. 환호하는 사람들을 보자 마치 구름 위를 걷는 듯했고, 어디 한 군데 아픈 줄도 몰랐다.

  생포한 거란군 포로를 비롯해 끌고 온 말과 낙타가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그들 뒤로는 거란군이 버리고 간 칼과 창, 활과 화살을 실은 수레가 길게 늘어섰다.

  왕순은 영파역에 친히 나와 강감찬과 승리한 군대를 맞이하기 위해 기다렸다. 붉은 비단을 드리운 커다란 채붕 주변에 몇 십 개의 등을 달아 궁궐처럼 보였다. 자색 비단옷을 입고 복두를 쓴 관헌방의 악공들이 거문고와 피리, 현을 연주하며 흥을 돋우었다. 

  눈처럼 새하얀 말을 탄 귀부인이 강감찬 장군의 군대 앞으로 나왔다. 흰말은 금으로 만든 멈치(말의 입 가장자리에 대는 막대기 모양의 기구)와 은으로 정교하게 조각한 등자(말 위에 앉을 때 발로 디디는 것)를 하고 있었으며 오색 비단으로 만든 안장이 깔려 화려하기 그지없었다. 귀부인은 인경궁주로 승급된 궁인 김 씨였다.

  흑요석같이 윤기 흐르는 검은 말을 타고, 허리에 금을 입힌 칼을 찬 왕순과 시위들이 나타났다. 역시 금멈치를 한 말에 금을 조각한 안장이 깔려 있었다. 금실 은실로 용과 봉황을 수놓은 안장이 보석처럼 빛났다. 금동 갑옷을 입은 왕순은 강감찬과 군대가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왕순의 뒤로는 개경에서 달려온 고관대작들, 각지에서 온 장수들과 지휘관들이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길게 늘어섰다. 강감찬과 그 부대, 고려 황제를 보러 나온 민호들이 구름같이 몰려들었다.

  드디어 붉은 비단옷에 뿔 모양 장식이 달린 허리띠를 차고 강감찬이 나타났다. 그는 화려하게 꽃을 수놓은 옷을 입고, 양쪽에 꿩의 깃을 단 모자를 쓰고 있었다. 호랑이 가죽을 두른 활집이 눈에 띄었다.

  강감찬은 왕순에게 절을 올렸다.

  "폐하, 어쩐 일로 이 먼 곳까지 납시었사옵니까. 소신 소임을 마치고 개경으로 달려가는 중이었습니다."

  왕순은 말에서 내려 땅에 엎드린 강감찬을 일으켜 세웠다.

  "공이 아니었더라면 내 어찌 이같이 기쁜 날을 맞이할 수 있었겠소!"

  왕순은 강감찬을 끌어안으며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내 공에게 무어라……."

  왕순은 목에 메어 말을 잇지 못했다.

  "어서 준비한 것을 가져오라."

  왕순의 명을 받은 시위가 재빨리 비단방석을 받쳐 들고 앞으로 나왔다. 왕순은 비단방석 위에 놓인 관을 친히 강감찬의 머리에 씌워주었다. 여덟 가지 꽃을 금으로 만들어 장식한 관이었다.

  "폐하, 어찌 이리 귀한 것을 내리시는지요. 소신, 황공할 따름이옵니다."

  "공에게 무엇을 준들  아깝겠소."

  왕순은 왼손으로 강감찬의 손을 잡고 오른손으로 술잔을 채우며 승리를 축하했다.

  이때 개경에서 불러온 교방의 기녀들이 뛰어나왔다. 좁은 갓을 쓰고, 붉은 저고리 위에 감색 장의를 입은 이들은 양손에 작은 칼을 들고 검무를 추었다. 자태가 선녀 같은 기녀들이지만 손에 든 번득이는 단검과 융복이 서늘함을 자아냈다.

  "공이 거란군을 물리칠 때 선랑들이 청자장구를 쳤다고 들었소. 그 소리에는 고려군을 보호하고 적들의 사기邪氣를 물리치는 기운이 있었다지. 신출귀몰한 전술과 군사들의 용맹함으로 큰 공을 세웠소만 청자장구 또한 큰일을 한 게 틀림없소. 그 용한 청자장구 소리를 들려주시오."

  "여부가 있겠습니까."

  강감찬은 무애를 불러 선랑들을 도열시켰다. 서란도 한쪽에서 이들을 지켜보았다.

  덩- 덩- 덩- 덩-

  청자장구가 울리기 시작했다. 그 소리는 선랑들을 울리고 강감찬과 황제를 휘감았다. 사람과 땅을 울리며 하늘로 멀리멀리 퍼져나갔다.(p. 305-309 <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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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정미 역사소설/ 천년의 빛깔 청자를 빚은 소녀『도공 서란』에서/ 2019. 9. 16. <마음서재> 펴냄

* 손정미/ 서울에서 태어나 연세대학교 영문학과를 졸업했다, 1999년 《조선일보》에 입사해 문화부, 사회부, 정치부, 산업부 기자로 활동했다, 사회부 경찰 출입 기자로 사건 · 사고 현장을 취재했으며, 조선일보의 첫 정치부 여기자로 여야 정당을 출입했다.

문학 담당 기자 시절 고 박경리 선생으로부터 소설을 써보라는 권유를 받고, 어린 시절부터 꿈꿔온 소설가가 되기 위해 2012년에 신문사를 나왔다. 그리고 2년 뒤, 삼국통일 직전의 경주를 무대로 한 첫 역사소설 『왕경 王京』을 발표했다. 이어 고구려의 위대한 영웅이자 세계사적으로 거대한 족적을 남긴 광개토태왕을 심도 있게 연구해 2017년에 장편 역사소설 『광개토태왕』을 출간했다.

치밀한 고증과 문학적 상상력으로 역사의 한 장면을 생생하게 그려온 작가는 신라-고구려에 이은 역사 3부작으로 고려시대를 배경으로 한 이 소설을 완성했다. 『도공 서란』에서 그는 고려창자를 빚은 도공들의 예술혼과 거란의 침입에 맞섰던 강감찬의 귀주대첩을 실감나게 그려 고려의 활력과 자신감을 우리 앞에 펼쳐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