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슬기로운 삶/ 박판식

검지 정숙자 2019. 12. 19. 02:55

 

 

    슬기로운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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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판식

 

 

  나는 팔 다리 여섯 개 달린 괴물, 불행의 핵폭발이 가져온 뭉게구름

  물론 나도 안다 천당도 텅 비어 있지만 지옥도 꽉 차지는 않았다는 것을

 

  옛날에 나는 구포 다리 아래서 밧줄을 던져 너를 건져 올렸었다

  팔 다리 없이 몸통만 있는 게를

 

  너를 괴롭혔던 게 왜 갑자기 생각이 나서 오늘 나를 괴롭히는지 모르겠지만

 

  아내는 유달리 불행이 많았던 그 집을 떠나며 대야를 버리고 왔다

  방문들을 꼭꼭 닫아 걸어놓고 왔다

  나는 꽤 오랫동안 내 홈 때문에 사람을 망칠까봐 사람을 사귀지도 않았다

  부자가 되면 시를 잃을까봐 돈도 멀리했다

 

  그래도 가끔 나는 아이들에게 포켓용 동물사전을 읽어 주기는 했다

  사자는 30년을 살고 코끼리는 80년을 살지만 쥐는 7년이면 죽어요

  그러면 아빠는요? 아빠는 낙천주의자야, 아빠는 시간 보따리가 있어

  보따리를 펼치면 아이들은 파도를 탔고 나무에 기어올랐고

  코끼리 코에서 미끄러져 내려왔다

 

  30초, 아니 20초면 충분하다

  내 마음 안에서 파리 같은 새 생명이 태어났다 죽는 일은

  오늘은

  과녁을 빗나간 화살이 통쾌하고 시원하게 내를 건너고 숲을 지나

  하늘에 가 박힌다. 검푸른 피를 왈칵 쏟으며 하늘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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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지션』 2019-겨울호 <POSITION ⑤ 근작시>에서

   * 박판식/ 2001년『동서문학』으로 등단 , 시집『밤의 피치카토』『나는 나와 어울리지 않는다』, 산문집『날개 돋친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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