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자작나무 봉인/ 박후기

검지 정숙자 2019. 12. 22. 01:38

 

    자작나무 봉인

 

    박후기

 

 

  자작나무 가지 떼어낸 자리

  흉터가 눈모양으로 남겨졌다

  상처가 아문 자리에

  눈이 생긴 것이다

 

  가난의 비탈에 올곧게 서서

  근친과 무리지어 살던

  청맹과니 아버지의 식립植立

  저녁 숲으로 돌아온 새들이

  날마다 자작나무의

  눈알을 파먹었다

 

  자작나무 잎사귀는

  바람의 노래를 듣지 못하는

  서글픈 귀다

  후두두둑 떨어지는 귀, 잎사귀들

  화농化膿의 잎이 진다

 

  귀를 버린 자작나무는

  혜안慧眼을 갖기 위해

  스스로 가지를 잘랐다

  상처가 아물자 비로소

  내면을 들여다볼 수 있는

  눈이 생겼다

 

  우리 몸의 흉터가 감긴

  눈처럼 생긴 이유는

  그 눈 속에 당신이 지은 죄와

  내가 숨긴 죄, 그리고

  당신과 나를 울린

  그 모든 슬픔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흉터는

  봉인封印된 아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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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동네』2019-12월호 <신작시 # 2> 에서

  * 박후기/ 2003년『작가세계』로 등단, 시집『격렬비열도』『사랑의 발견』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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