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환상벌레/ 안은숙

검지 정숙자 2019. 12. 18. 02:42

 

 

    환상벌레

 

    안은숙

 

 

  플라타너스 잎에 벌레구멍이 생겼다

  그때부터 이파리에는 작고 투명한 관통의 벌레가 산다

  잎은 구멍 난 바람을 먹고 산다

  더 이상 기어 다니지도 않고 촉수도 없이

  투명한 알을 낳기도 하는 벌레

 

  가끔 몸을 옮겨 다니는 통증이 있다면

  발이 몇 개인지 살펴볼 일이다

  몇 해의 변태기를 거치는지 알아볼 일이다

  잠깐의 결집을 위해 평생

  몸을 옮겨다니는 통증벌레

  가끔 심장에서 내 숨을 덜어먹기도 하고

  어느 때는 간지러운 부위로 기어 다닌다

 

  세상엔 벌레보다 벌레구멍이 더 많다

  그 구멍에 벌레가 사는 일도 드물다

  어느 날 불시에 발견되는 벌레들이 있고

  그 몸집만한 분실이 반드시 숨어 있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기억들

  불시에 찾아와 몸을 부르르 떨게 만드는

  날벌레의 날갯짓이 있다

  점점 깊은 침묵으로 숨어들어가서는

  들어온 흔적도 없이 살고 있는 벌레

  그 몸에 참 많은 것들을 맡겨놓고 살았다

 

  뜬금없이 통증이 생길 때 더듬어 보는 가려운 기억은

  제자리가 없어 이리저리 옮겨 다닌다

  흔적으로 살아있는 벌레도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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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지션』 2019-겨울호 <POSITION ④ 신작시>에서

   * 안은숙/ 2015년『실천문학』으로 등단, 공저『언어의 시, 시의 언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