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나보다 오래 울었던 너에게만/ 이기린

검지 정숙자 2019. 12. 19. 02:04

 

    나보다 오래 울었던 너에게만

 

    이기린

 

 

  동그라미의 내부를 빈틈없이 칠하며

  답은 미래가 될 거다.

  이 말의 테두리 안에 서 있어야 안전하다는 믿음이 있었지

  나는 그 믿음의 경계에서 속삭이고 있어

 

  지겨워,

  창은 무게중심을 옮기며 계절을 한 칸씩 지워버린다

  문제를 푸는 동안

  한때의 굳은 주먹들이 활짝 펴져 낙하하기도 해

 

  두렵지,

  선명히 기억되기 전 사라지는 것이

  외치는 소리에 묻혀버리는 것이

 

  흠씬 얻어맞은 뒤 진이 빠져버린 새벽

  나는 기다란 네 목을 닦아주는 꿈

  닦을수록 너는 흘러내리는 꿈

  우리는 문제를 풀면서 오늘에게 문제를 내고 있구나

  옆자리를 하나씩 지워가고 있구나

 

  이것 먹어

  저것 먹어

  색을 나눠주는, 어린 나무 이야기

  손바닥 나뭇잎이 나뭇잎의 바깥을 위로하는 이야기

  유리창에 적어두고 갈게

 

  눈을 감으면 나는 눈썹 위로 찾아올 거야

  떠오를 거야

 

    --------------

  *『포지션』 2019-겨울호 <POSITION ④ 신작시>에서

  * 이기린/ 2011년 『시평』으로 등단, 시집『,에게』

'잡지에서 읽은 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슬기로운 삶/ 박판식  (0) 2019.12.19
기울어진 밤/ 홍인혜  (0) 2019.12.19
환상벌레/ 안은숙  (0) 2019.12.18
참을 수 있는 거리/ 류근  (0) 2019.12.18
나무랄 데 없이 완벽한 나무들/ 김건영  (0) 2019.1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