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기울어진 밤/ 홍인혜

검지 정숙자 2019. 12. 19. 02:32

 

 

    기울어진 밤

 

    홍인혜

 

 

  나는 쏟아지고  있습니다. 기울어진 집이 기울어진 침대에 누워. 기울어진 창문 비뚜름한 커튼 사이로 보이는 기울어진 불빛들. 기울어진 오선지에 흘려 쓴 음표들처럼 나는 이 도시에 간신히 매달려 있습니다. 세상의 기울기는 나를 자주 술 취하게 하고 대화의 빗면에 쉽사리 미끄러지는 나는 똑바로 살라는 말을 종종 듣습니다. 누군가를 사랑했지만 아무리 마주 보아도 경사가 졌고 나는 기울어진 책상에 엎드려 일기를 쓰는 일이 많았습니다. 글자들이 흘려내려 발치에 쌓였습니다. 한때 기울였던 마음들 이제는 다 되찾아왔는데 어제보다 마음이 비탈진 이유는 무엇일까요. 기우뚱한 머리에 잠이 깃들지 못하고 나는 마룻마닥에 널브러져 있는 슬리퍼를 신습니다. 기울어진 사다리를 기어 올라가 기울어진 굴뚝 옆에 서서 기울어진 건물들을 내려다봅니다. 기울어진 달의 창백한 한숨과 쓰러져가는 방에 누운 사람들의 비스듬한 잠들. 나는 양 팔을 벌리고 기울어진 박공지붕 위를 반듯하게 걸어갑니다. 천천히 아래로 쏟아지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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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지션』 2019-겨울호 <POSITION ④ 신작시>에서

  * 홍인혜/ 2018년『문학사상』으로 등단 , 산문집『지금이 아니면 안 될 것 같아서』『혼자일 것 행복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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