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화상
이영식
동란動亂 통 탄피처럼
흙바닥에 뚝 떨어진 연필 한 자루
침 발라서 꾹꾹 눌러쓰며 왔지
시작부터 기울어진 운동장
볼펜과 만년필 틈에 뼈저리게 굴러
구더기 떼 들끓던 날들이여
밑그림만 그리다가 몽당해지고
바로 서나 거꾸로 누워도
그게 거기인 시절 밖의 나이
아무짝에 쓸모없다 내팽개칠 때쯤
부러진 연필심처럼 먹먹한 울음 속으로
시가 왔다
별도 별사탕도 되지 않는
시, 외눈박이 사랑에 눈멀어서야
꽃도 좋고 가시도 좋았다
슬픔을 경작하느라
솔개그늘만 한 밭 한 뙈기 품어본 적 없으니
몽당연필 같은 같은 시집 몇 권 달랑 메고
참 가볍게도 가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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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동네』2019-12월호 <신작시 # 2> 에서
* 이영식/ 2000년『문학사상』으로 등단, 시집『휴』『희망온도』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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