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을 수 있는 거리
류근
좋은 시를 두 편이나 읽었다. 나는 몹시 만족스러웠으므로 나에게 국수를 한 그릇 사 주기로 하였다. 길 건너 국숫집으로 가는 길에 빗방울이 일곱 개 떨어졌다.
창이 넓은 이층 국숫집에서 판모밀을 먹으며 나는 좀전에 읽었던 시를 생각하였다. 내게서 떠나버린 시가 냇물에 놓쳐버린 고무신처럼 저 멀리 남의 영혼에 흘러가 닿아 있었다. 나는 조금 서럽고 그리웠다. 내가 나의 시를 잃고 떠도는 동안 너희 또한 나를 잃고 얼마나 서럽고 그리웠으랴.
집으로 돌아오는 횡단보도 앞에서 신호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한 사백 개쯤의 빗방울을 머리에 맞았다. 우산을 살까, 하다가 관두기로 하였다. 집에는 포장을 벗기지도 않은 중국산 우산이 세 개나 있고, 우산 한 개면 라면이 세 봉다린데… 모처럼 함민복 시인의 말투로 생각하였다. 그러자 마음이 퍽 따뜻해졌다.
그러나 이토록 비가 오는데 나는 몸이 아파서 술도 마실 수가 없게 되었구나 생각하자 아까 읽었던 두 편의 시가 다 허망하였다. 횡단보도 앞에서 비맞고 있을 때 우산도 못 되어주는 시, 아플 때 까스활명수만도 못한 시, 정작으론 라면 한 봉다리만도 못한 시. 그러자 나를 떠나버린 시가 한 개도 안 서럽고 안 그리워졌다.
--------------
*『포지션』 2019-겨울호 <POSITION ④ 신작시>에서
* 류근/ 1992년《문화일보》신춘문예로 등단, 시집『상처적 체질』『어떻게든 이별』
'잡지에서 읽은 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나보다 오래 울었던 너에게만/ 이기린 (0) | 2019.12.19 |
---|---|
환상벌레/ 안은숙 (0) | 2019.12.18 |
나무랄 데 없이 완벽한 나무들/ 김건영 (0) | 2019.12.18 |
통화음이 길어질 때/ 진혜진 (0) | 2019.12.18 |
로이 리히텐슈타인의「행복한 눈물」/ 이영신 (0) | 2019.12.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