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참을 수 있는 거리/ 류근

검지 정숙자 2019. 12. 18. 02:16

 

 

    참을 수 있는 거리

 

    류근

 

 

  좋은 시를 두 편이나 읽었다. 나는 몹시 만족스러웠으므로 나에게 국수를 한 그릇 사 주기로 하였다. 길 건너 국숫집으로  가는 길에 빗방울이 일곱 개 떨어졌다.

 

  창이 넓은 이층 국숫집에서 판모밀을 먹으며 나는 좀전에 읽었던 시를 생각하였다. 내게서 떠나버린 시가 냇물에 놓쳐버린 고무신처럼 저 멀리 남의 영혼에 흘러가 닿아 있었다. 나는 조금 서럽고 그리웠다. 내가 나의 시를 잃고 떠도는 동안 너희 또한 나를 잃고 얼마나 서럽고 그리웠으랴.

 

  집으로 돌아오는 횡단보도 앞에서 신호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한 사백 개쯤의 빗방울을 머리에 맞았다. 우산을 살까, 하다가 관두기로 하였다. 집에는 포장을 벗기지도 않은 중국산 우산이 세 개나 있고, 우산 한 개면 라면이 세 봉다린데 모처럼 함민복 시인의 말투로 생각하였다. 그러자 마음이 퍽 따뜻해졌다.

 

  그러나 이토록 비가 오는데 나는 몸이 아파서 술도 마실 수가 없게 되었구나 생각하자 아까 읽었던 두 편의 시가 다 허망하였다. 횡단보도 앞에서 비맞고 있을 때 우산도 못 되어주는 시, 아플 때 까스활명수만도 못한 시, 정작으론 라면 한 봉다리만도 못한 시. 그러자 나를 떠나버린 시가 한 개도 안 서럽고 안 그리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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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지션』 2019-겨울호 <POSITION ④ 신작시>에서

 * 류근/ 1992년《문화일보》신춘문예로 등단, 시집『상처적 체질』『어떻게든 이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