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허희_ 확률론적 비주기성 흐름(발췌)/ 제4의 감옥 : 이시경

검지 정숙자 2019. 12. 2. 21:17

 

 

    제4의 감옥

    -별별 감옥들이 생겨났다가 사라지고 다시 생겨난다

 

    이시경

 

 

  스스로 밀폐된 공간에 저를 가두었는가?

  레코드판의 클래식이 그리워지는 양자의 계절이다

 

  1

  사느냐 죽느냐

  몰려오는 수압에 잡념마저 하나 둘 양자화된다

  댓글 수사로 모 검사는 투신하고

  계절을 따라 에너지들이 자리를 놓고 빙글빙글 돈다

 

  비어있다는 것은 뭔가로 채워진다는 것

  흙탕물이 흘러들지 말라고 가슴앓이로 제방을 쌓고

  늦가을 추위에 쫓겨 둥지를 찾느라 숲은 겉과 속이 다르다

  겨울에 익숙해진 몸들은 낙엽처럼 빈 공간을

  시간으로 채우며 모래를 들여다본다

 

  여기가 어딘지는 영점들에게 포로로  끌려다녀 봐야 안다

  이쪽은 저쪽에서 보면 이쪽보다 저쪽에 가깝다

 

  윤리가 수평으로 두 지점에 말뚝을 박고

  이념이 수직으로 두 곳에 경계석을 세우면 드러나는 속살들

  무덤에서부터 언덕 너머 구름에 이르기까지

 

  속도가 제 집을 찾아가는 십이월

  낙엽은 아래부터 채워지고 마지막 이파리가 불안하더니

  올해도 새싹들이 도약을 꿈꾸고

 

 

  2

  금속의 자유 전자들같이 주변을 떠돌다가

  무거운 핵에 이끌려 미지의 4차원 공간에 다시 갇힌다

  공전과 자전 속에서 밀물과 썰물이 반복된다

 

  시도 제 영역이 있으니 경계선을 잘 살피라는

  원로 교수의 말씀이 감옥의 x-방향의 길이를 제한한다

 

  시는 리듬과 은유라고 대못을 박듯이

  힘주어 말했던 유명 시인의 기세가 y-방향의 폭을 억압한다

 

  가슴을 울리는 시를 써 보라고 권하는 친구들의 말이

  z-방향의 깊이를 속박하고 그 속으로 밀어넣는다

 

  공간이 좁아들수록 울림의 빛깔은 더욱 더 선명하고 명징하다

 

  너의 율법이 널 미소 공간에 속박하는가?

  그 속에서 너의 꽃은 빨강, 노랑, 파랑 불꽃으로 피어날 것이다

  살며시 그러나 뚜렷하게

 

 

  3

  치매는 심해보다 깊고 차갑다

    -전문-

 

 

  ▶ 확률론적 비주기성 흐름/ 4차원 세계에 살기...(발췌)_ 허희/ 문학평론가

  제4의 감옥을 궁리하기에 앞서 제1 · 제2 · 제3의 감옥이 무엇인지 궁금해집니다. "별별 감옥들이 생겨났다가 사라지고 다시 생겨난다"는 부제도 붙어 있습니다만, 이시경 시인이 상정하는 감옥은 보통의 형무소와는 전혀 관련이 없습니다. 시를 읽어보건대 아마 그것은 어떤 세 가지 요소들과 관련을 맺고 있는 게 아닌가 합니다. 예컨대 3차원의 좌표를 나타낼 때 기본이 되는 x · y · z방향이라든가, 빛의 삼원색-빨강 · 초록 · 파랑 말이지요. 물론 시에는 "꽃은 빨강, 노랑, 파랑 불꽃으로 피어날 것"이라고 쓰여 있습니다. 초록에서 노랑으로의 변화가 두드러지지요. 하나 그렇다 해도 세 가지 요소들의 범주는 깨지지 않습니다. 그야말로 제1부터 제3까지의 감옥인 겁니다. 따라서 "너의 율법이 널 미소 공간에 속박하는가?"라는 질문은 실은 긍정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x-방향의 길이를 제한"하고, "y-방향의 폭을 억압"하며, z-방향의 깊이를 속박"한다는 표현을 그가 괜히 쓴 것이 아니니까요.

  위와 같이 정리를 하고 나면 제4의 감옥은 쉽게 답이 나옵니다. 이것은 우리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4차원의 세계를 지칭하지요. 수직선 네 개가 서로 직교하는 공간인 4차원은 오직 머릿속에서만 상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시경 시인은 4차원을 시로 구현해냅니다. 그에게 세상은 3차원 이상의 공간입니다. 그러니까 4차원 공간에 갇혀 있다고 해도, 이시경 시인의 세계는 3차원을 사는 우리에게 지금까지 느낄 수 없었던 것들을 느끼게 만드는 겁니다. 이는 "사느냐 죽느냐/ 몰려오는 수압에 잡념마저 하나 둘 양자화된다"는 시구와 조응합니다. 고전물리학의 결정론적 세계가 아닌 양자물리학의 확률론적 세계에서는 "이쪽은 저쪽에서 보면 이쪽보다 저쪽에 가깝다"는 문장도 진실이 됩니다. 이처럼 "윤리"와 "이념"으로 재단되지 않는 4차원의 시를 쓸 거라고 이시경 시인은 포부를 밝힙니다. "리듬과 은유"로 "가슴을 울리는" 시의 "제 영역"을 넘어서는 시. 그리하여 그는 제3의 감옥이 아닌 제4의 감옥에 기꺼이 갇힌 수인이 됐습니다.(p.147-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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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대시』2019-8월호 <현대시가 선정한 이달의 시인/  신작시/ 작품론>에서

  * 이시경/ 2011년『애지』로 등단, 시집『쥐라기 평원으로 날아가기』『아담의 시간여행』

  * 허희/ 문학평론가, 2012년『세계의문학』으로 평론 부문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