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송기한_ 비평가가 주목하는 시인들(발췌)/ 침묵의 사계 : 김혜천

검지 정숙자 2019. 12. 2. 00:54

 

 

    침묵의 사계

 

     김혜천

 

 

  시간 속에 스며 있던 침묵이 하루하루의 몸을 일으킨다

 

  가장 먼저 광장에 도착한 아이들이 공놀이를 한다

  공이 담벼락에 맞아 튕겨 나오듯 아이들의 말소리가 마치 봄의 사물에게 길을 가르쳐 주듯 튕겨 나온다

 

  그렇게 돌연 봄이 오고

  침묵의 체에서 떨어져 나온 하얀 꽃들

  시간의 갈라진 틈으로 돋아나오는 어린 이파리들

  한 그루 나무에서 또 한 그루 나무에게로 옮겨 가는 연둣빛 침묵

 

  숲속의 침묵이 여름 한낮의 터널을 빠져나온다

  거칠게 여름을 부려놓을 적의는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았으나 여름은 소란스럽게 찾아왔다

  울울한 숲 사이를 뛰노는 정령들, 고라니가 등불처럼 까만 눈동자를 밝히는 한낮의 고요, 물러날 것 같지 않은 푸른 기세도

 

  침묵이 한 번 숨을 고르고 가을이 오면 먼 길 떠나기 전 전깃줄에 앉은 철새들처럼 사과나무 가지에 매달려 익어가는 사과들, 떨어지는 사과를 받으려고 내미는 손 사이에 흐르는 고요, 사물의 색이 점차 짙어지고 침묵은 이미 추수의 감사로 사과주를 마시는 사람들의 노래 속에서 공명한다

 

  침묵이 눈이 되어 내린다, 모든 사물과 공간은 순백에 침묵에게 점령당하고 시간 안에서 일어났던 일들도 인간의 말도 침묵 속에 갇힌다, 침묵은 이정표와도 같이 망각과 용서만이 남은 하얀 들판, 시간이 정지된 무음의 세계로 우리를 인도한다

  -전문, 『시와표현』2019. 9-10월호

 

 

  ▶ 시의 산문화 경향(발췌)_ 송기한/ 문학평론가

  이 작품은 자연의 질서를 침묵의 한 과정으로 풀어낸 시이다. 실상 이 시인이 관심을 가졌던 것은 자연의 현상적 변화라기보다는 선험적인 시간의 흐름으로 이해하는 데 놓여 있다. 세계 속에 던져진 지상의 모든 것들은 시간의 지배로부터 자유로운 것이 아무 것도 없다. 모두가 시간의 노예인 까닭이다. 시간이 공포스러운 것은 그것이 쉽게 감각되거나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은 어느 날 갑자기 그 변화된 모습을 우리에게 드러낼 뿐이다. 그런 돌발성이 우리를 두렵게 만든다.시인은 시간의 유연한 흐름과 그 선험적 특성을 사물들과의 적절한 결합 속에서 읽어내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흐름을 더 매끄럽게 만든 것이 산문적 흐름이다. 만약 이런 함의를 담고 있는 시를 쓸 경우 간결성과 압축성이 동반된 짧은 서정시로 한다면, 그 흐름이 단속적으로 될 가능성이 매우 크다. 그러면 시간의 자연스런 흐름이라는 서정적 주제가 손상을 입게 되는 것은 자명한 것인데, 시인은 그러한 위험을 회피하기 위해 산문적 흐름의 방식을 도입한 것처럼 보인다. 산문적 형식과 시간의 전개라는 내용이 적절한 조합을 이루면서 이 작품은 '침묵의 사계'라는 주제의식으로  표출되고 있는 것이다.(p. 235-237)

 

   ---------------

  *『시와표현』2019. 11-12월호 <비평가가 주목하는 시인들>에서

  * 송기한/ 1991년『시와시학』으로 등단, 저서『현대시의 정신과 방법』『육당 최남선 문학 연구』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