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최진석_ 뒤늦게 도착한 출발의 예감(발췌)/ 개입 : 정영효

검지 정숙자 2019. 10. 15. 02:52

 

 

    개입

 

    정영효

 

 

  그가 사라져 버리자 그의 이름이 드러났다 그가 살던 집이 드러났고 문득 목격자가 나타나면서 그의 마지막 모습이 드러났다 그가 계속 발견되지 않는 동안 그의 가치관이 발견되었으며 사람들의 기억이 하나둘 모여 그가 미처 알지 못했던 일화를 만들었다 그가 어디로 갔는지 몰랐으므로 그의 과거는 명확해졌다 혼자 남겨졌던 그의 마지막 모습도 명확해져서 더욱 오랫동안 사라지기 위해 과거에서 나오지 않았다 그는 무슨 잘못을 저지른 것일까 그는 사라진 게 아니라 단지 이곳에 나타나지 않을 뿐일까 늘어난 말들에서 알지 못할 가능성이 열렸고 그가 사라진 방향의 반대편이 그가 비운 집이 될 때까지 그의 마지막 모습이 그를 찾고 있었다

   -전문-    

 

 

   ▶ 뒤늦게 도착한 출발의 예감(발췌)_ 최진석/ 문학평론가

   자기에 대한 물음과 답변을 맴도는 '회유'의 쳇바퀴는 마침내 스스로를 잃어버리는 지경에 이른다. 하이데거를 빌어 말하자면, 거기서 드러나는 것은 도대체 없는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 있다는 것, '있음'이라는 무엇이다. 정작 본체라고 믿었던 것이 상실되었을 때, 그것을 둘러싸고 있던 것들이 돌연 자신을 주장한다. "집"과 "목격자", "가치관", "기억", "일화", "과거"…… 흔히 정체성이라 부르는 누군가의 신변에 대한 정보가 드러나기 시작한다. 기실 그것들은 없는 것,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 아니라 그저 "그"의 주변에 있었기에 "그"에 가려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았던 것들이다. "그"가 없으므로, 여기에는 "그"의 빈자리를 통해 메워지는 모종의 이야기가 생겨났다. 어쩌면 누군가는 사소한 모든 것의 가치와 존귀함이 이로써 드러났다고 기뻐할지도 모른다. 나쁘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그"의 부재가 불러낸 이야기는 '유일한' 이야기가 아니라 "그"의 존재와는 '다른' 이야기일 따름이다. 때문에 "그"가 없어도 여전히 "그"에게 빚지고 있는 이 세계가 있고, 타인들이 있으며, 그 모두가 직조하는 이야기가 있다. 바꿔 말해, "그"는 부재한 채로 지금-여기에 "개입"했다. 이것이 바로 도대체 없는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 있다는 언명의 뜻일 터. "그는 사라진 게 아니라 단지 이곳에 나타나지 않을 뿐"이어서 "늘어난 말들에서 알지 못할 가능성이 열"리게 된 것이다.(p. 74-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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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예바다2019-가을호 <이 시인의 징후독법/ 신작시/ 작품론> 에서

  * 고봉준/ 2009년 《서울신문》신춘문예 당선, 시집『계속 열리는 믿음』

  * 최진석/ 2015년『문학동네』로 등단, 저서『감응의 정치학: 코뮨주의와 혁명』『민중과 그로테스크의 문화정치학: 미하일 바흐친과 생성의 사유』, 역서『누가 들뢰즈와 가타리를 두려워하는가?』『해체와 파괴』『러시아 문화사 강의』(공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