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고봉준_ 유령과 더불어(발췌)/ 지박령(地縛靈)-유령 : 장이지

검지 정숙자 2019. 10. 14. 03:08

 

 

    지박령地縛靈   유령

 

    장이지

 

 

  지낼 곳이 없다고 그는 말했다. 열심히 찾고 있지만 번번이 실패라고 하면서 시무룩해졌다. 보증금 때문에, 높은 월세 때문에 갈 수 있는 곳이 없다고 풀이 죽었다. 그러면 집을 찾을 동안만 같이 있을래? 하고 제안한 것은 나였지만.

 

  방에 돌아오면 항상 그가 있다. 그는 수험서를 잔뜩 들고 와서 가끔 밑줄을 그으며 공부를 한다. 밤늦게까지 스마트폰을 돌여다보면서 청색광을 흘린다. 내 잠옷을 빌려 입고 내 냉장고를 축내면서 와식臥食 생활의 정점을 보여준다. 내가 아끼는 누비이불과 거의 일체가 되어간다. 방 이야기를 꺼내면, 또다시 시무룩해져서는 눈가가 촉촉해진다. 그러면 내게는 내 잠옷 밑으로 길게 삐져나온 그의 흰 발목이 보인다. 참 말쑥한 슬픔이로고! 그는 점점 희미해져만 간다. 다른 게 아니라 바로 그것이 슬픈 것이다.

 

  나는 이 말쑥하게 키만 큰 유령을 피해 다시 거리로 나선다. 무언가 ㅇ영양가 있는 야식을 사다 먹여야겠다. 하지만 나도 나다. 참.

   -전문-

 

  * 장이지, 『레몬옐로』, 문학동네, 2018, 18쪽.

 

 

   ▶ 유령과 더불어(발췌)_ 고봉준/ 문학평론가

   '지박령地縛靈'의 사전적 정의는 '자신의 죽음을 깨닫지 못하고 죽음을 당한 장소에서 떠도는 귀신'이다. 지박령은 떠도는 유령이 아니라 특정한 장소에 매여 있는 유령이다. 1연에서 화자는 "지낼 곳"이 없다고 호소하는 '그'에게 "집을 찾을 동안만 같이" 지내자고 제안한다. 하지만 약속과 달리 '그'는 어느 순간부터 화자의 '방'에 눌러앉았다. "방에 돌아오면 항상 그가 있다."라는 정술처럼 '그'에게는 약속을 이향할 의사가 없고, '나'에게는 그런 '그'를 내쯫을 냉정함이 없다. 화자는 '방'을 벗어나지 않으면서 "내가 아끼는 누비이불과 거의 일체가 되어"가는 상대를 특정한 장소에 묶여 있는 '유령'으로 인식한다. 결국 '방'의 문턱을 넘는 것은 '나'의 몫이 된다. "나는 이 멀쑥하게 키만 큰 유령을 피해 다시 거리로 나선다."처럼 화자는 '방'에 대한 점유권을 잃어버리고 길을 떠돌면서도 '그'에게 먹일 야식을 고만한다.(p.122-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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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동네2019-10월호 <징후들> 에서

  * 고봉준/ 2000년 《서울신문》신춘문예 평론 부문 등단, 평론집『반대자의 윤리』『비인칭적인 것』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