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유적지에서-안중근/ 김진돈

검지 정숙자 2019. 10. 16. 01:37

 

   

    유적지에서

    -안중근

 

     김진돈

 

 

  연추煙秋는 선열의 숨결이 뿌려진 심장이다

 

  현장강의를 들으면 과거는 상승기류로 순간 온다 삶과 죽음은 백지 한 장 차이, 절규가 들렸다 시간의 간격을 지우고 역사의 중심, 연추는 갈증과 배고픔을 뱉어 내고 있다 아침이 파르르 떤다 크라스키노 근처, 단지동맹을 맺고 국내 진공작전을 시도한 도마, 문명에 눈뜬 맹서는 더욱 단단해졌지 처절하게 깨진 얼룩, 울컥한 허기를 모두 기억해 낼 수는 없다만 길 벌판에 그들이 없었다면 우리는 없다 오늘

 

  뒤척거리던 비는 방향을 바꾼다. 쉼 없이 밀려드는 밀물처럼, 밑바닥에서 튀는 빗방울처럼 폭로하는 대지, 하얼빈에서 이토 일행의 죄악을 주살한 의사, 조선, 만주족, 소련의 국경지대를 둘러싼 가파른 긴장, 국내 진공작전 위해 넘었던 장고봉, 민족의 영토였던, 끝없이 봉인된 발해 성터, 우연인가 필연인가, 두만강을 건너 연해주로 통하는 하산, 나진항과 하산역을 잇는 묵허우, 신경제지도는 둥글게 돌아온 기다림이다 그들이 없었다면 우리는 궤도에 없다

 

  결기가 과거로 기울 때마다 현실은 부정맥이다 유월의 끝자락에 매일처럼 내리는 암호, 단지동맹을 맺은 12인이 모였듯, 백 년을 버틴 이름은 후손의 눈길에서 모인다 햇살은 바닥에 무릎 꿇은 채, 눈 감으면 아우성 같은 밀실계단은 무한공간으로 확장된다 불안했던 당시의 공포를 씻어 낸다 전갈이 많았던지, 감싸 안듯 끝없이 전송되는 사선의 비, 힘내! 하고 사선을 빗겨 간다 꺼칠한 봄은 또 온다고 하늘과 땅의 경계가 무화되는 안팎에서

 

  과거와 현재를 잇는 빗소리와 목소리는 벼랑의 절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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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예바다』2019-가을호 <청탁시>에서 

  * 김진돈/ 2011년『문학사상』&『시와세계』로 등단, 시집『그 섬을 만나다』『아홉 개의 계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