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명/나의 근작시

슬픔의 횡포

검지 정숙자 2011. 11. 13. 23:18

 

 

  슬픔의 횡포

 

    정숙자

 

 

  순환선의 하역

  여러 번 봤다

  그럼에도 익숙지 않다

 

  (시계만이 싱싱하군)

  실시간 밖에 잠복했던 생각들이

  내 좌초를 구경한다

 

  생각들을 밀어내지 못하는 생각이 바닥으로-밑바닥으로 가라앉는

다. 본인의 상황임에도 큭! 결코 흥미롭지 않다. 젖는다 젖었다 완전

히완전히완전히 갇혀버렸다. 이제 날개는 고사하고 지느러미나마 구

걸해야 될 판이다. 방향을 가리던 촉수는 창공에서 해체 중.

 

  생각지 말아야겠다는 생각만이 지속된다. 빛이 개입하려다 이내 사

라진다.

 

  광고지에서 괜찮은 그림을 오려낸다. 그림과 이면지를 덧붙이거나 자

르거나 반듯반듯 손질한다. 벌써 96매 째. (사이즈 25cm×9.5cm) 100매

가 쌓이면 스프링을 꿰어 공책으로 탄생시킬 것이다. 이 치밀, 이 근검,

이 부질없음의 배경은

 

  발길 무너지는 언덕

  침묵 살아나는 소요

  실핏줄 뜯기는 적막

 

  지느러미 싹틔우려면…

  물굽이 거스르려면…

  여명에 닿으려면…

 

  다시 구석기시대를 건너야겠지. 돌칼을 만들고, 구름 너머로 화살촉

을 먹이고 21세기 말까지 헤엄쳐 올라야겠지. 신생의 눈과 어깨가 열리

기까지 재생노트 몇 권이 더 만들어지겠지. 내가 거꾸러지는 현장은 내

가 구슬려야 할 전설의 척추….

 

  주검마저 놓치는 마지막까지 매순간순간 반전을 구매, 외상은 없는

직거래.

 

  *『애지』2011-겨울호, <애지 초대석>

'그룹명 > 나의 근작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휘청거리는 강  (0) 2011.12.20
아방가르드와 어벙가르드  (0) 2011.12.11
食葬  (0) 2011.11.13
많은팔신호등  (0) 2011.10.18
수정궁  (0) 2011.09.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