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의 횡포
정숙자
순환선의 하역
여러 번 봤다
그럼에도 익숙지 않다
(시계만이 싱싱하군)
실시간 밖에 잠복했던 생각들이
내 좌초를 구경한다
생각들을 밀어내지 못하는 생각이 바닥으로-밑바닥으로 가라앉는
다. 본인의 상황임에도 큭! 결코 흥미롭지 않다. 젖는다 젖었다 완전
히완전히완전히 갇혀버렸다. 이제 날개는 고사하고 지느러미나마 구
걸해야 될 판이다. 방향을 가리던 촉수는 창공에서 해체 중.
생각지 말아야겠다는 생각만이 지속된다. 빛이 개입하려다 이내 사
라진다.
광고지에서 괜찮은 그림을 오려낸다. 그림과 이면지를 덧붙이거나 자
르거나 반듯반듯 손질한다. 벌써 96매 째. (사이즈 25cm×9.5cm) 100매
가 쌓이면 스프링을 꿰어 공책으로 탄생시킬 것이다. 이 치밀, 이 근검,
이 부질없음의 배경은
발길 무너지는 언덕
침묵 살아나는 소요
실핏줄 뜯기는 적막
지느러미 싹틔우려면…
물굽이 거스르려면…
여명에 닿으려면…
다시 구석기시대를 건너야겠지. 돌칼을 만들고, 구름 너머로 화살촉
을 먹이고 21세기 말까지 헤엄쳐 올라야겠지. 신생의 눈과 어깨가 열리
기까지 재생노트 몇 권이 더 만들어지겠지. 내가 거꾸러지는 현장은 내
가 구슬려야 할 전설의 척추….
주검마저 놓치는 마지막까지 매순간순간 반전을 구매, 외상은 없는
직거래.
*『애지』2011-겨울호, <애지 초대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