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승의 기쁨
유혜자/ 수필가
"두려움과 병마가 없었더라면 나의 인생은 키方向舵가 없는 배와 같았을 것이다."
뭉크(Edvard Munch 1863-1944, 81세)가, 그의 예술 전체가 이 작품으로 하여 새로운 전기를 맞았고 많은 작품들이 이 작품 덕택으로 존재하게 되었다는 「아픈 아이」(The Sick Child)를 보려고 오슬로 국립미술관을 찾았다.
뭉크의 작품실에 들어서니 대표작 「절규」와 「생명의 춤」과 더불어 「아픈 아이」가 있었다. 침대에 기대앉은 공허한 눈빛의 소녀는 뭉크의 누나 소피이고, 아이의 손을 잡아준 여인은 어머니를 여읜 뭉크 형제들을 보살펴준 이모로 추정된다는 해설사의 설명이었다. 지면에서 본 인쇄화보다 죽음의 그림자가 훨씬 실감나게 드리워져 있었다. 뭉크는 1885년 이래 연작 「아픈 아이」를 많이 그렸는데 그것은 네 번째 작품이었다. 1년 동안 이 그림을 수차례에 걸쳐 고치고 또 그렸다. 물감을 긁어낸 후 테레핀 오일로 녹여내는 등 처음의 인상, 투명한 피부, 고통스러움과 떨리는 손을 캔버스에 생생하게 표현하려고 무척 애썼다고 한다.
오슬로 빈민가의 의사였던 아버지의 병원에서 환자의 임종을 늘 보았던 어린 뭉크의 트라우머는 짙은 어둠의 그림자를 드리워 평생을 신경쇠약과 알코올 중독으로 고생하며 살게 했다. 한마디로 「아픈 아이」는 절망적인 그림인데 이 그림 덕으로 뭉크의 모든 상처가 에너지로 바뀌고 모든 망설임이 약동하는 자신감으로 바뀌게 되었다니, 얼마나 고치며 절망에서 헤어나려 했을까. 고친 흔적을 육안으로 알 수는 없었지만, 의도대로 표현하려고 지우고 덧칠하여 자신을 일으키려던 흔적을 찾아보려다가 다른 관람실로 옮길 수밖에 없었다.
놀랍게도 나는 다른 방에서 「아픈 소녀」(The Sick Girl)라는 제목의 그림을 또 발견했다. 흰 블라우스와 담요로 몸을 감싸고 있는 병색의 소녀 그림의 작가는 뭉크의 스승 크리스티안 크로그(Christan Krohg 1852-1925, 73세)였다. 나는 스승과 제자의 그림이 국립미술관에 함께 소장되었다는 사실에 남모르게 기쁨이 일었다. 미술관 입구에 아이들이 빵을 얻으려고 서 있는 「생존을 위한 투쟁」도 크로그의 그림이고, 2층으로 가는 벽에도 크로그의 「레이프 에릭손이 북아메리카를 발견하다」라는 그림이 있었다. 빈민, 병자의 문제를 중점적으로 다루어 사회의 취약한 부분을 묘사한 스승을 닮아, 뭉크도 단순한 묘사가 아닌 인간의 삶과 죽음의 문제, 그리고 고독, 질투, 불안 등을 인물화로 표현하는 걸 즐겼다. 이는 본인이 태어날 때부터 약해서 이런 방면으로 많이 생각했기 때문이다.
오슬로 미술학교의 교장이던 크로그는 뭉크를 가르쳤는데 좋은 스승이자 조언자였다. 특히 뭉크의 「아픈 아이」가 누나 소피의 죽음에 대한 화가의 감정을 심리적으로 묘사했다는 이유로 평론가들이 혹평할 때 크로그는 뭉크의 편으로 역성을 들었다. 어쩌면 자신의 작품 「아픈 소녀」보다 훨씬 심오한 뭉크의 「아픈 아이」를 보고 청출어람靑出於藍을 느끼지 않았을까. 스승 크로그가 뭉크보다 열세 살이 많았음을 생각하다가 나보다 열세 살밖에 많지 않은 초등학교 때의 은사님이 생각났다.
스승님은 사회생활을 늦게까지 한 제자를 자랑스러워 하셨다. 병약하고 눈도 나빴던 나를 살펴주시고 용기를 주셨던 선생님. 결손가정에서 절망했던 뭉크가 역동적인 걸작들을 보여줄 때 스승 크로그는 얼마나 기뻤을까. 스승은 뭉크보다 20년 먼저 돌아갔지만 뭉크가 사업가적 수완과 추진력으로 전시회를 기획하며 능동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을 대견하게 지켜보았을 것이다. 감히 세계적인 화가와 비교하는 것이 외람되지만, 나의 스승도 약하고 내성적인 제자가 매스컴에서 일하는 것을 대견스러워하고 늦게까지 도움을 주셨는데 지금은 알아보지도 못하는 병환중이시어서 안타깝다.
뭉크는 병약하면서도 필생의 목표였던 존중받는 예술가로서의 삶도 이루어내고, 노년엔 노르웨이의 아름다운 자연을 그려내어 스승뿐만이 아니라 노르웨이 국민들에게도 가쁨을 주었다. ▩
-----------------
* 동국문학인회 vol.46『東國詩集』에서/ 2019. 5. 17. <문학아카데미> 펴냄
* 유혜자柳惠子/ 40년 충남 강경, 국문과, 동 대학원, 72년『수필문학』으로 등단, 수필집『스마트한 선택』『미완성이 아름다운 것은』등 10권, 음악에세이『음악의 알레그레토』등 5권/ 동국문학상(2007), 현대수필문학상, 한국문학상, 펜문학상, 조연현문학상 등// 현 격월간『그린에세이』편집인 ▣
'에세이 한 편' 카테고리의 다른 글
몽중인(夢中人)/ 강경애 (0) | 2019.06.19 |
---|---|
닫힌 대문 빗장을 여는 그리움 2/ 지연희 (0) | 2019.06.02 |
애인 갱생의 우화/ 송희복 (0) | 2019.05.25 |
안시성(安市城)/ 진원종 (0) | 2019.05.23 |
제32회 동국문학상 수상_이명지(수필) '내가 반한 명화'/ 심사평/ 수상소감 (0) | 2019.05.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