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한 편

애인 갱생의 우화/ 송희복

검지 정숙자 2019. 5. 25. 13:32

 

 

    애인 갱생의 우화

 

    송희복/ 문학평론가 · 영화평론가

 

 

  가을이 깊어져 간다. 머잖아 예제 국화꽃이 만발할 것으로 보인다. 요즘 젊은이들이야 어떨지 모르겠지만 우리 세대에겐 국화 하면 시인 서정주의 명편 「국화 옆에서」를 떠올릴 것이다.

  이 시를 생각할 때마다 생각나는 것은 윤회와 연기라고 할 것이다. 윤회와 연기는 맥략이 비슷한 쓰임의 낱말이다. 글자 그대로 말해, 마치 수레바퀴가 끊임없이 돌고 도는 것처럼 인간의 삶과 죽음이 그치지 아니하면서 돌고 도는 것이 윤회요, 현상의 원인인 인과 그 조건인 연이 서로 관계를 맺으면서 모든 존재를 생기하게 하고 소멸하게 하는 것이 연기이다. 윤회든 연기든 간에, 양자는 개별성보다 관계성을 중시하는 개념의 틀 속에 놓인 것이 사실이다.

  이 시가 굳이 심오한 사상의 배경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고 해도, 성장하던 우리 세대에게 끼친 영향은 결코 작지 않았다. 어떤 점에서는 이 시는 사랑노래로 읽힌다. 10대 후반의 소년치고 연상의 여인을 그리워하지 않았던 이, 어디 있었으랴? 20대 청년이 성숙한 여인에게 남몰래 품은 연심 같은 것이 왜 없었겠는가? 우리 세대의 사랑의 비밀스런 얘깃거리들은 이 국화꽃에 모조리 투영된다.

  그런데 지금의 성장 세대는 다를 수도 있다. 내가 십여 년 전에 고등학생을 면접할 때 들은 얘기다. 시인 서정주의 국화꽃은 일본 천황가를 상징하는 문장文章으로서의 국화꽃이라고 말이다. 물론 우리의 젊은 시절엔 전혀 들어보지 못한 얘기다. 하기야 무지하고도 몽매한 문학평론가도, 스스로 진보임을 자처하는 교사들도 그런 말을 해대니 청소년들이 어찌 물들지 않겠는가?

  제국주의의 일본이 이 땅에서 물러난 후에, 일본 천황을 찬양하는 시를 쓰다니! 아무리 미워도 그렇게 말하는 게 아니다. 시인이 아니라 정신병자로 비난의 표적이 될 게 불 보듯 뻔한데, 누가 그런 시를 쓰겠나? 그런 시를 써서 어쩌자는 건가? 비난도, 무고도, 어느 정도 상식의 선에서 출발해야 한다.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윤회의 극점에, 「국화 옆에서」가 놓여 있다. 이케다 다이사쿠는 일본의 불교적 평화운동가로서 노벨평화상 후보로 이름이 자주 거론되곤 한다. 그가 1993년 9월 24일에 행한 하버드대학교의 강연에서, 이런 말을 남겼다. 인과 연의 관계성이란 것은 자아의 소멸이 아니라, 자타의 생명이 융합하면서 넓혀가는, 자아를 소아에서 대아로, 그리고 우주대宇宙大로 확대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시편 「국화 옆에서」에서 보여주고  있는 시인 서정주의 상상력은 자아의 소멸에서 비롯하는 윤회가 아닌, 자타의 생명력이 융합해 하나의 우주대로 확대된 윤회이다.

  이 시에서 시인은 말했을 것이다.

  한 송이의 국화꽃이 그저 피어나는 게 아니라 소쩍새의 울음, 먹구름 속의 천둥, 간밤의 무서리 등이라는 자연의 조건 속에서 생기한다고, 모든 것은 상호의존성을 가진다고, 모든 것은 원인과 결과의 관계 속에서 존재한다고 말이다.

  이처럼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 무서리, 불면, 이런 우주론적인 연기緣起의 요소들이 복합적으로 작용을 해서 아름다운 결과물을 빚어낸다. 말하자면 시인이 가진 생각의 씨앗 한 톨이 우주대로 확대되는 장엄한 상상력의 소산인 국화꽃인 게다. 상상의 꽃으로 장엄한 이 국화꽃은 불교에서 말하는 바, 화엄華嚴의 표상일 테다.

  시인 서정주는 자신의 시편 「국화 옆에서」를 가리켜, 인체 윤회의 상념, 음성 윤회의 상념, 애인 갱생의 환각을 묘파한 것이라고 스스로 해석한 바 있었다. 매우 거칠고 생경한 언술과 함의로 표현된 이 자가해석은 그 동안 사람들의 주목을 받지 않았다. 나는 하지만 이 가운데 '애인 갱생'이란 말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말의 뜻은 짐작되는 바와 같이 '사랑하는 사람은 다시 꽃으로 태어난다.'는 것이다.

  꽃을, 죽은 애인에 댜한 환각으로 그린 사례는, 이 시 밖에도 서정주의 시 여기저기에서 살펴볼 수 있다. 그 대표적인 사례는 몇 포기의 시커먼 민들레꽃으로 환각되는 저승의 소녀들을 생각한다는 내용의 시 「무슨 꽃으로 문지르는 가슴이기에 나는 이리도 살고 싶은가」와 한 송이의 모란꽃으로 피어있는 처녀도 죽은 애인임이 드러나 있는 「인연설화조」가 아닌가 한다. 사랑하는 사람은 죽어서도 이처럼 꽃으로 거듭 태어난다.

  시편 「부활」은 절창 중의 절창이라고 할 수 있다. '한번 가선 소식 없든 그 어려운 주소住所에서 너 무슨 무지개로 내려왔느냐.' 사별한 옛 애인을 잊지 못하고 그리워하는 화자는 이렇게 부르짖으면서 종로 네거리에서 만난 무수한 소녀들의 모습 속에서 죽은 애인 '유나'의 모습을 환각한다. 열아홉 스무 살쯤 되는 그 소녀들은 여기저기의 가지마다 매달려 있는 무수한 꽃잎과도 같으리라.

  시인 서정주는 애인 갱생이란 말에 뜻을 따로 부연한 적이 없었다. 내가 굳이 비평적인 해설을 덧붙이자면, 이런 게 아닐까 한다. 살아있는 애인은 애인이 아니다. 죽어야 사는 내 마음 속의 애인이 진짜 애인이다. 시인이 이런 생각에 부합하는 상념의 틀을 지녔다면, 그에게 있어서의 이 틀은 소위 '애인 갱생의 사상'이라고 말할 수도 있지 않을까?

 

 

  나는 어제 목동에 있는 한국문인협회 사무실에 들렀다. 오전에 편집회의가 있어서다. 점심떄가 되어서야 긴 회의를 마쳤다. 때마침 60대 중반의 여성 시인 한 분이 방문해 여러 문인과 합류해 식사 시간을 가졌다. 그분은 나의 학창 시절의 은사이기도  한 미당 서정주 선생이 마지막으로 시단에 추천해 보낸 시인이다. 선생이 등단을 주선해준 마지막 제자인 셈이다. 문단에선 이런 관계를 사제師第로 보는 경향이 있다.

  이분은 식사를 하던 중에 이런 말을 했다. 남편과 사별하고 난 뒤에 인생이 송두리째 바뀌었다고 한다. 바뀐 것 중의 하나가 살아선 그 '웬수' 같던 남편이 죽게 됨으로써 그를 비로소 사랑하게 되더라는 것이다. 그분의 남편은 엘리트 직업 군인이었다. 남편의 주변엔 늘 술과 여자와 도박이 있었다고 한다. 속썩이는 남편, 속상해 하는 아내. 흔히 있는 얘기다. 하지만 얼마나 심했으면 삶에 절망해 두 차례나 자신의 목숨을 끊으려 했을까?

  남편이 죽고 난 다음부터 남편을 진정토록 사랑한다는 이 역설! 이 역설이야말로 바로 애인 갱생의 사상인 게다. 살아있는 애인은 진정한 애인이 아니다. 죽어야 비로소 사는 내 마음 속의 애인이 진짜 애인이다. 이런 상념이 스승에서부터 제자에게로, 의식하지 못하는 상태로 이어져 갔다고 생각하니, 이 역시도 무엔가 신비로운 인연의 법칙, 이른바 인이 연하여 일어난 일만 같다는 생각이 든다. 서정주 시의 핵심에, 애인 갱생의 사상이 스며들어 있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사랑하는 사람이 다시 꽃으로 태어난다는 관념은 실화가 아니다. 실화가 아니기 때문에, 일종의 우화로 봐야 한다. 한마디로 말해, 서정주 시의 핵심 속에, 애인 갱생의 사상이 우의적인 얘깃거리의 시로 묘사되어 있는 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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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송희복 산문집『우리가 햄릿이다』에서/ 2017. 2. 24. <보고사> 펴냄

  * 송희복/ 문학평론가 & 영화평론가, 동국대학교 · 동 대학원 국어국문과 졸업(문학박사), 산문집『나는 너에게 바람이고 싶다』(2001),『꽃을 보면서 재체기라도 하고 싶다』(2008) 등 여러 분야에 걸쳐 많은 저서가 있음 / 2016년 제9회 청마문학연구상 · 동국문학상 수상// 現 진주교육대학교 국어교육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