닫힌 대문 빗장을 여는 그리움 2
지연희/ 시인 · 수필가
지나가 버린 시간 속에는 최소한 오늘보다 나은 젊음들이 물위를 튀어 오르는 물고기의 파닥임으로 숨을 쉬고 있다. '수필가'라는 이름을 얻게 된 그즈음이 내게는 가장 의미 있는 시간이었지 싶다.
인사동, 지금은 한국의 전통문화를 체험하기 위해 해외 여러 나라의 관광객들이 인산인해를 이루는 명소이지만 1980년대 초 한국문인협회 인사동 시절에는 한적한 진품 전통 도자기, 공예품 점포, 표구사 화방들이 즐비한 곳이었다. 고풍스런 점포들 사이 좁은 골목길을 들어서면 골목길 양옆으로 이어진 한옥이 정겹게 자리해 있었다. 그곳은 주로 한정식 식당으로 간단한 회합의 자리를 감당할 수 있는 정도의 공간이었다.
모처럼 인사동에 발길을 디디면 찾아들게 되는 식당은 '이모집'이었다. 구부러진 골목길 한쪽 묵직한 대문을 열고 들어서면 이모님이 버선발로 달려와 끌어안을 것 같은 정겨움이 흐르던 곳이었다. 정갈한 식단으로 마치 어머니의 손맛을 체감하며 인정이 넘치는 안주인의 배려에 문학동인회의 약속 장소로 이곳을 찾았다. 집에서 먹는 반찬만큼이나 부담 없는 나물과 된장찌개 등이 입맛을 더하곤 했었다. 그 까닭인지 전통 한옥의 구조를 그대로 살려 손님을 받고 있던 '이모집'은 제법 많은 문인들이 선호하는 곳으로 오랜 시간을 이어 오며 기억하게 했다. 지금도 "이모!" 하고 부르던 단골손님들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또한 인사동 시절의 그림 한 편이다. 한국문인협회는 『월간문학』신인상을 받고 문단에 등단한 사람들에 대한 관심이 적지 않았다. 시, 시조, 소설, 수필 등 신인문학상 장르별 수상자들을 하나로 규합하여 문학적 소견을 나누며 창작의 열정을 확대하기 위해 가끔 자리를 마련하여 친목을 다지게 해 주었다. 미래시동인(시), 창작동인(소설), 대표에세이(수필)들이 당시 동인 활동의 시작으로 아직도 그 면모를 잇고 있다. 김동리 이사장님의 격려 말씀 속에는 문인의 자세와 올바른 문인으로의 문단에 기여하는 목적에 대해서도 말씀해 주셨다. 어느덧 시간의 흐름은 문단에도 많은 변화를 안게 하였다. 인사동 문인협회가 대학로에 이르게 되고, 지금은 대학로에서 목동으로 이전하여 대한민국예술인센터 건물 10층에서 업무를 수행하고 있다.
앞서 거론한 천상병 선생님의 인사동 문인협회 방문 사건 이후 몇 달 지나지 않은 가을의 어느 날이었다. 한국문인협회 주최 회원들의 시화전이 명동 근처 제일은행 전시실에서 열렸다. 문단 말석의 내게도 작품 전시 기회가 주어져 전시장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그곳 전시장 한쪽에서 감상한 시 한 편에 대하여 깊은 생각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김동리 선생을 비롯한 어른들의 시화 곁에 천상병 선생님의 맑은 이슬 같은 순수의 언어로 직조된 시를 감상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때묻지 않은 울림을 지닌 시어들은 얼마 전 내가 목격한 그 남루한 행색의 선생님이 아니었던 까닭이다. 한낮 술에 취해 사시다가도 멀쩡한 생시에는 펜을 들어 당신의 심연 깊은 영혼의 말을 원고지 위에 그려 내셨다는 것이다.
삶은 다양한 사람 수만큼 다양한 삶을 살아가게 한다. 한 사람의 문학인으로 40년 가까이 살아왔지만 문학은 어떤 아픔도 어떤 모순도 이겨내는 치유의 명약이라는 사실을 믿게 한다. 크게 소리 내어 말할 필요가 없으며 조용한 언어의 발걸음을 따라 주어진 노래를 부를 수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다. 한국문인협회의 발자취와 더불어 한국 문단의 주변 이야기도 지워지지 않는 생명력으로 함께할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p.352-35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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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문학』2019-6월호 <목동살롱 42>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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