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시집 · 공검 & 굴원

제32회 동국문학상 수상_정숙자(시) '공검' 외 2편/ 심사평/ 수상소감

검지 정숙자 2019. 5. 18. 23:13

 

 

<2019, 제32회 동국문학상 수상작(시)/심사평/수상소감>

 

    공검空劍* 외 2편

 

    정숙자

 

 

  눈, 그것은 총체, 그것은 부품

  알 수 없는 무엇이다

 

  지운 것을 듣고, 느낌도 없는 것을 볼 뿐더러

  능선과 능선 그 너머의 너머로까지 넘어간다

 

  눈, 그것은 태양과 비의 저장고

  네거리를 구획하고 기획하며 잠들지 않는

 

  그 눈,을 뺴앗는 자는 모든 걸 빼앗는 자다, 하지만

  그 눈,은 마지막까지 뺏을 수 없는, 눕힐 수 없는

  칼이며 칼집이며 내일을 간직한 자의 새벽이다

 

  양날이지만 하나이고 하나이면서 수천수만, 아니 그 이상의 팔이라 할까

 

  (나부끼지 않지만 죽지 않았습니다. 바람- 그냥 보냅니다. 대충 압니다. 나누지 않은 말 괜찮습니다. 여태 잎으로 수용하고 뿌리로 살았거든요. 대지의 삶은 적나라한 게임입니다. 간혹 구름이 움찔하는 건 어느 공검에게 허를 찔렸기 때문, 일까요?)

 

  공검은 피를 묻히지 않는다

  다만 구름 속 허구를 솎는

 

  그를 일러 오늘 바람은 시인이라 한다

  공검은 육체 같은 건 가격하지 않는다

    -전문-

 

   * 공검 : 虛를 찌르는 칼. 필자의 造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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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굴원

 

 

  책상 모서리 가만히 들여다보다

  맑은 이름들 떠올려보다

  나 또한 더할 수 없이 맑아지는 순간이 오면

 

  눈물 중에서도 가장 맑은 눈물이 돈다

 

  슬픈 눈물

  억울한 눈물

  육체가 시킨 눈물이 아닌

  깨끗하고 조용한 먼 곳의 눈물

  생애에 그런 눈물 몇 번이나 닿을 수 있나

  그토록 맑은 눈물 언제 다시 닦을 수 있나

 

  이슬-눈, 새벽에 맺히는 이유 알 것도 같다. 어두운 골짜기 돌아보다가, 드높고 푸른 절벽 지켜보다가 하늘도 그만 깊이깊이 맑아지고 말았던 거지. 제 안쪽 빗장도 모르는 사이 그 훤한 이슬-들 주르륵 쏟고 말았던 거지.

 

  매일매일 매일 밤, 그리고 자주 맑아지는 바탕이라 하늘이었나? 어쩌다 한 번 잠잠한 저잣거리 이곳이 아닌 삼십삼천 사뿐히 질러온 바람. 나는 아마도 먼- 먼- 어느 산 너머에서 그의 딸이었거나 누이였을지 몰라.

 

  그의 투강 전야에

  그의 마지막 입을 옷깃에

  '중취독성衆醉獨醒' 담담히 수놓던 기억

  돌덩이도 묵묵히 입 맞춰 보냈던 기억

 

  몇 겁을 다시 태어나고 돌아와도 그 피는 그 피!

 

  이천 년이 이만 년을 포갠다 한들

  그 뜻, 그 그늘이면 한 목숨 아낄 리 없지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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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극형 인간

 

 

  육체가 죽었을 때 가장 아까운 건 눈동자다

  그 영롱함

  그 무구함

  그 다정함

  이, 무참히 썩거나 재가 되어버린다

 

  다음으로 아까운 건 뇌가 아닐까

  그 직관력

  그 기억력

  그 분별력

  이, 가차 없이 꺾이고 묻히고 만다

 

  (관절들은 또 얼마나 섬세하고 상냥했던가)

 

  티끌만한 잘못도 없을지라도 육신 한 덩어리 숨지는 찰나, 정지될 수밖에 없는 소기관들. 그런 게 곧 죽음인 거지.

 

  비

  첫눈

  별 의 별 자 리

  헤쳐모이는 바람까지도

 

  이런 우리네 무덤 안팎을 위로하려고 철따라 매스게임 벌이는지도 몰라. 사계절 너머 넘어 펼쳐지는 색깔과 율동 음향까지도

 

  북극에 길든 순록들 모두 햇볕이 위협이 될 수도 있지

  우리가 몸담은 어디라 한들 북극 아닌 곳 없을 테지만

 

  그래도 우리는 정녕

 

  햇빛을, 봄을 기다리지. 죽을 때 죽더라도

  단 한 번 가슴 속 얼음을 녹이고 싶지

     -전문-

 

   * 심사위원 : 신경림  문효치  박제천  유혜자  장영우(심사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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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사평 / 장영우>  

 

  정숙자는 1952년 전북 김제에서 출생하여 동국대 교육대학원(철학전공)을 수료했으며, 1988년 『문학정신』으로 등단하여 『그리워서』(명문당, 1988)를 비롯하여 아홉 권의 시집을 발간하였다. 그의 시는 독자들의 안이한 접근을 허락하지 않으려는 듯 겹겹의 의장意匠으로 보호막을 치고 있지만 곰곰이 들여다보면 맑은 심성과 그윽한 시향詩香을 문득 느낄 수 있다. ‘허를 찌르는 칼’이란 뜻의 ‘공검空劍’이란 조어를 만들어내는 언어감각도 그렇거니와, “세상 사람이 모두 술 취해 정신을 놓을지라도 자신만은 깨어있겠다衆取獨醒”는 옛사람의 고집을 되새기는 기개는 인정할 만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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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상소감>

 

    기포 없는 노력

    지속하겠습니다

   

   영예로운 ‘동국문학상’ 수상자로 선정해 주신 심사위원 선생님 여러분께 진심을 다해 감사드립니다. 저는 동국대 학부 출신도 아니고, 석사나 박사학위를 취득하지도 않았을 뿐더러 교육대학원의 철학과를 수료한, 매우 소박한 경력의 소유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동국문학회’ 출입을 자제한 이유도 그런저런 원인이 작용하지 않았나, 새삼 돌아보는 요즘입니다. 이제, 대학원 입학 당시에 품었던 ‘넓고 따뜻한 동국’의 ‘품과 문’에 다시 한 번 감동과 감사를 전하며 ‘동국문학인회’의 회원으로서 대외적으로나 대내적으로도 누가 되지 않도록 각별히 유념할 것을 홀로이 다짐해 봅니다.

   저는 그동안 시단에서 두 종류의 상을 봐왔습니다. 전자는 ‘내다보는 상’이고, 후자는 ‘돌아보는 상’이었는데요, 굳이 구체적으로 분류하자면 미래에 대한, 그리고 과거에 대한 격려라는 점에서 총체적 질량으로는 균등한 것입니다. 하지만 엄밀히 들여다보면 거기에는 엄청난 시간과 공간이 굽이굽이 존재한다는 점을 인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머리에 눈 덮인 제가 수상자의 입장으로서 가져야 될 자세는 무엇일까요? 삼십 년 동안이나, 아니 오륙십 년 동안, 아니 이승에서의 평생을 외골수로 시에만 몰두했으니 ‘이제 좀 느긋해도 괜찮아’ 연산해야 할까요?

   통시적인 언어이지만 저는 역사소설(손정미,『광개토태왕1』118쪽, 마음서재. 2017)에서 ‘관슬貫蝨'이라는 말을 발견했습니다. PC 검색창을 두드렸더니 “화살로 이의 가슴을 꿰뚫는다”는 뜻이었습니다. 옛날에 기창이라는 사람이 비위라는 활쏘기의 명수를 찾아가 ‘비장의 한 수’를 배우고자 했다는데요, 여차여차 수련 끝에 화살로 이의 가슴을 명중시켰다는 고사도 찾을 수가 있었습니다. 한 편의 시를 얻는 일이 어찌 비위와 기창의 활쏘기와 다르다 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다만 이후로도 오로지 다른 세상은 모르는 채 정진에 용맹을 더하는 것으로 남은 삶을 밝힐까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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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국문학인회 vol.46『東國詩集』에서/ 2019. 5. 17. <문학아카데미> 펴냄

 * 정숙자/ 동국대 교육대학원 철학과 수료, 1988년 『문학정신』으로 등단, 시집 『감성채집기』『살아남은 니체들』등, 산문집 『밝은음자리표』등, 질마재문학상 등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