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시집 · 공검 & 굴원

김명철_생명; 슬픔으로부터 사랑에게(발췌)/ 죽은 생선의 눈 : 정숙자

검지 정숙자 2019. 4. 7. 01:20

 

 

    죽은 생선의 눈

 

    정숙자

 

 

  죽고 싶다. 죽어야겠다. (차라리)

 

  그런 마음. 꺼내면 안 돼. 왜냐고?

 

  저 머나먼

  경계 밖에서

  그랬잖아

 

  살고 싶다. 살아야겠다. (진정으로)

 

  그런 바람 포개다가 여기 왔잖아

  엄마-wormhole을 통해 왔잖아

  갖고 싶었던 그 삶

  지금이잖아. 여기가 거기잖아

 

  죽어본 적 없으면서 겁 없이 '죽음 희망' 그런 거

  품지 말자꾸나. 우리! 경험으로 죽는 건 괜찮지만

 

  경험일 수 없는 죽음 속에서

  오늘 이 순간 아주 잊은 채

 

  다시 태어나고 싶을 거잖아? 이게 몇 번째 생일까 생각해봤니? 만약 말이야. 그 비밀이 열린다면, 우린 또 얼마나 큰 후회와 자책/가책에 시달릴까 생각해봤니?

 

  접시에 누운 생선이 나를 바라보면서

 

  종을 초월한 자의 언어로 그런 말을 하더군

  그로부터 난 생선의 눈을 먹지 않게 되었지

    -전문, 웹진 『시인광장』, 2018-11월호

 

  ▶ 생명; 슬픔으로부터 사랑에게(발췌) _ 김명철/ 시인

  죽고 싶어서 죽는 생명체는 없는 것 같다. 생명 유지가 불가능해서, 정신적 혹은 물질적 혹은 육체적으로 삶을 견뎌내기 어려워서 자발적으로 생명을 포기하는 일이 있다 할지라도 그것은 죽음 자체에 대한 희원이나 염원 때문이 아니다. (프로이트가 인간의 원초적인 두 가지 본능으로 에로스와 타나토스를 들고 있으나 기실 타나토스 자체의 실재를 인정하기에는 실체적 증거를 찾기가 매우 애매하다. 에로스의 약화 혹은 부재를 타나토스라고 지칭할 수는 있을 것이다) 생명체에는 그 스스로도 제어하지 못하는 자기 생명 훼손에 대한 무조건적 방어기제를 지니고 있다. 자발적이든 비자발적이든 죽음 직전에 놓여 있는 상황에서라 할지라도 생명체는 자신에게 닥쳐오는 불시의 생명 위협에 대하여 즉각적이고 무의지적인 저항 반사행동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존재다. 사실 깊이 들여다보면 자발적인 생명 포기 행위라 할지라도 그것은 타 생명을 보호하기 위한 경우일 때가 대부분이다. 생명은 왜 이렇게 생명 자신을 보존하려고 하는 것인가./ '생명'이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20세기에 들어서면서부터 신화적 창조론을 한쪽으로 몰아놓은 과학의 발달에 힘입어 생명의 기원에 대한 연구와 실험이 본격적으로 진행되어 오고 있다. 그 결과를 크게 나누어보면 외계유입설내계자연발생설이 있다고 한다. 외계유입설은 매년 우주에서 지구로 날아드는 1만 4천 톤의 우주먼지(우리나라의 남극 기지에도 이 우주먼지를 채취하기 위해 인력이 파견되어 있다고 한다)에 유기물질이 포함되어 있어 그것이 생명의 기원이 되었다는 학설이며, 내계자연발생설은 원시지구의 환경에서 무기물질이 유기물질로 변환되었다는 학설인데 코아세르베이트 실험을 통해 이미 오래전에 증명된 학설이기도 하다. 어느 경우이든 '생명'의 탄생이란 "저 머나먼 경계 밖에서" 이루어진 일인 것 같다.

 

  '인간'이란 종만을 생각해보면 생명의 기원이 내계 무기물질에서 출발한 것이든, 외계 유기물질에서 출발한 것이든(이 유기물질도 우주에서 이루어진 무기물질에 의한 자연발생일 가능성이 높겠지만) 참으로 안쓰럽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우리는 정말 '엄마-wormhole'을 통과해오기 전에 "살고 싶다. 살아야겠다. (진정으로)"라는 의지가 있었을까. 만약 우리가 지금과 같은 유기물이 되기 이전에 무기물이었다면 그 무기물이 그런 염원을 지닐 수 있었을까./ 최근에 밝혀진 바에 따르면 어떤 박테리아는 섭씨 122도 바다 밑 열수구나 지하 2.8㎞에서 우라늄을 먹으며 천 년을 산다고 한다. 도대체 '생명'이란 무엇일까. 생명이란 무엇이기에 무기물질이 유기물질이 되려는 것이고 유기물질이 인간으로까지 되려는 것일까.(되려는 것일까? 아니면 인간은 시간과 공간의 특정한 환경 하에 그냥 단순히 발생한 물질적 우연일까) 왜 죽으면 "다시 태어나고 싶"은 것일까. 왜 "이게 몇 번째 생일까 생각해" 봐야 하는 것일까. 우리의 생명의지는 어떻게 생겨난 것일까. 삶과 죽음의 비밀, 그 비밀이 열린다면, 설혹 말로만의 '죽고 싶다'라 할지라도 그 '죽음'에 우린 또 큰 자책과 가책에 시달리게 될까./ '나'는 완전태로서의 물질 단자와 완전태로서의 정신/영혼 단자가 결합된 신에 의한 완전한 집합체인가.(Cf. 라이프니츠의 單子論; monadologia)  그렇다면 지금의 '나'는 불완전한 채 온전하다는 말인가. 완전태로서의 '나'라고 하면 '완전'이란 의미 속에 이미 '불완전'을 내포하고 있지 않는가. 바꾸어 말해서 증오 없는 사랑이나 불행 없는 행복이나 고통 없는 쾌락이나 악이 없는 선들은, 순수한 사랑이나 순수한 행복이나 순수한 쾌락이나 순수한 선들은 본래적 의미에서부터 이미 불완전하고 불가능한 것이 아닌가. 그래서 우리에게 슬픔도 그렇게 오는 것인가. 슬픔이 없는 삶은 완전한 것이 못 되어서 필연적이며 불가항력적으로 와야만 하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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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웹진『시인광장』 2019-4월호 <시인광장 포엠리뷰【131】김명철의 포엠리뷰[5]> 에서

  * 김명철/  2006년『실천문학』으로 등단, 시집『짧게, 카운터펀치』『바람의 기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