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시집 · 공검 & 굴원

전해수_ 기호의 서식들(전문) ; 시사사 포커스_ 정숙자/ 작품론

검지 정숙자 2019. 4. 19. 22:46

 

<시사사 포커스_정숙자/ 작품론>

 

    기호의 서식들

 

    전해수/ 문학평론가

 

 

  정숙자 시인은 2017년 시집 『액체계단 살아남은 니체들』을 발간한 후 시적 행보가 또렷해지고 있다. 시적 행보가 ‘또렷하다’는 것은 시인이 자신의 시작詩作 행위에 대해 일정부분 자신감을 지니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앞으로의 향방을 이미 결정해두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찬 평론가가 시집 해설에서도 언급하고 있듯 “순도 높은 정념”과 “웅숭깊은 존재론적 광휘”가 이번 신작시에서도 빛을 발한다. 정숙자의 시세계는 “실존적 성찰과 초월적 열망”으로 존재存在의 표상에 다가가려는 철학적 사유를 반복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액체계단 살아남은 니체들』보다 한층 더 과감해진 최근 발표 시의 시적 표현에 시선이 멈추는 것은 다만 ‘실존적 성찰’ 때문만은 아니다. 이제 정숙자의 시는 초월자의 실존이라는 철학적 사유 이외에도 시인이 선택하고 있는 기호학적 인식에 대한 이해를 필요로 한다. 정숙자의 시에 등장하는 낯선(?!) 기호들은 『액체계단 살아남은 니체들』에도 간혹 등장하였지만 최근 들어서는 더욱 두드러지고 있다.

  예컨대 이번 신작시 「π」에는 π(원주율)를 비롯하여 말줄임표와 줄표, 점선, 신조어, 쉼표마저도 의도적인 시적 장치로 사용하고 있다. 「엑스영역」에서는 X를 비롯하여 반 괄호, 줄금, 큰 따옴표, 쉼표의 위치를 부적절하게 배치하는 등 기호를 마치 영혼이 깃든 언어로 활용하고 있다. 「피어, 書」는 ‘書’와 ‘語’ 등 한자 자체를 ‘문서’나 ‘문패’처럼 실물로 인식하며 기호로 푼 언어의 형태를 다시 표상화된 기호로 교체하여 사용하기도 한다. 또한 기발표작 「얼음은 직선으로 부서진다」에도 시어와 대립하는 기호들을 등장시켜 기호 이상의 의미를 부여하고 있으며, 시 「진무한」은 큰 겹낫표와 작은 겹낫표의 겹치기 사용을 통해 ‘고독’에 둘러싸여 점령당한 화자의 혹은 스스로를 고독 안에 가두는 자폐적 태도마저 보이는 화자의 모습을 표출한다.

  특히 ‘거기)’, ‘그거)’ 등 지시어에 반쪽 기호를 보태어 방향성을 잃고 의아스러운 느낌을 불러일으키는 독자에게는 매우 불편한 감정을 갖도록 의도한다. 물론 기호의 서식들에 민감해진 최근시의 시적 발화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측면뿐만 아니라 부정적인 견해도 있을 것이다. 과연 시인은 왜 이처럼 많은 기호들을 시의 언어로 사용하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언어만으로는 기능하지 못하는 사유를 시인 스스로 시적 언어의 한계로 여기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문득 로만 야콥슨이 스쳐간다. 로만 야콥슨은 ‘무엇을 어떻게 나타낼 것인가’ 하는 것은 ‘언어’라는 ‘기호’의 재현 문제로 보았다. 어떤 것을 ‘선택’하고 ‘결합’한다는 것은 어떤 것의 약점과 강점을 고려해 최적화하려는 의지이다. 궁극적으로 언어가 지닌 기호적 코드의 ‘선택’과 ‘결합’의 차이로, 발신자가 보내는 메시지는 최적화되어 수신자에게 도달한다. 하나의 기호는 기호자체로서는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하지만, 다른 기호들과의 관계를 맺으며 의미를 부여받으므로 ‘선택’과 ‘결합’은 관계의 그물망 안에서 구조화된다.

 

 

   소나무 대나무 그리고

             또

          엄나무

 

    그렇게 심어야겠네

           홀로이

    헤테로토피아에 머

             물

             러

 

  외로이 외로이 그리고

             또

          서늘히

 

             피

             어

            ……

                                                              -전문,「피어, 書」

 

  그렇다면 시의 구조 자체가 기호(언어)로도 인식되는가. 정숙자의 이번 신작시 가운데 가장 위태롭지만 아름답고, 아름다우면서도 치명적인 불안의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핏빛) 시로 다가오는 위 시는 역삼각형의 구조를 띠고 있다. 툭 건드리면 무너질 것 같은 ‘모서리’의 아스라함으로 서 있는 위태로운 고독(!)이 내 안으로 밀물처럼 밀려들어 오는 것만 같다. “외로이 외로이”, “또 서늘히”, 피어서, 피와 같은 ‘語’와 ‘書’를 “소나무 대나무 엄나무” 꼭대기에 심고 있는 나의 고독이여. 이때의 “헤테로토피아”에는 무너지는 ‘환각’이 쓸쓸히 차오른다. 그러나 시인의 심정은 독자의 감정과는 달리 투시透視에 좀 더 가깝다. 벼랑 끝에 선 자의 위태로움을 정면으로 맞으며 피로 ‘語’로 ‘書’로 대적하며, 내부에 선명한 고독의 나무들이 흔들거리는 것을 주시하듯이, 응시한다.

 

 

      그렇게 심어야겠네

            홀로이

     헤테로토피아에 머

               물

               러

 

                                                             - 부분,「피어, 書」 

 

  특히 이 대목은 유토피아가 아닌 헤테로토피아에 머물러 있는 자아를 시인 스스로 인식하고 있는 것인데, 시인은 내면에서 혼돈을 일으키는 고독의 징후들이 말초신경까지 가닿아 있는 듯 매우 민감하다. 그것은 “【〔고독양식장〕】”의 테두리 안에서 배양된 고독처럼 가만 머물지 않고 길러진 것이어서 더욱 처연하면서도 위태롭다.

 

 

   거기) 잠기지 않으면 자갈이 보이지 않는다

  물결도 지느러미 띄워주지 않는다

  한 달, 일주일, 하루는 고사하고

  단 몇 시간만이라도

  그거) 마주하지 않으면

  미완/미답의 컬러

  찾을 수 없다

 

  우선, 많은 나무토막을 깎는다

  단단히 마음먹은 뒤

  울타리를 친다

  팻말도 건다

 

 【〔고독양식장〕】

 

  비가 쏟아지기를 기다린다

  태양의 방문 기다린다

  드디어 자갈이 움트기 시작한다

  숨소리가 물결을 일으킨다

  알을 깬 깃털구름

  일렁거린다

 

  그거) 풍성해진다, 출발이다, 여기서

  환상 저- 너- 머-

  고독이 날 점령하기 전에 내가 장악한다

 

  돌연변이 고독

  거기)서 배양한다, 가꾼다, 다만

  개인용이므로 절대 비매품

                                                             - 전문,「진무한」  

 

  유토피아와는 다른, 헤테로토피아가 푸코의 개념이라면 “진무한”은 헤겔의 개념이다. 최근 정숙자 시인은 철학적 개념마저도 기호로 사용한다. 기호로 사용하되 철학적 사유 안에서 기능하는 언어들은 시의 곳곳에서 기호적 상징으로써 체득된다. 위 시 「진무한」은 ‘악무한’과 대립되는 것으로 헤겔은 유한과 분리되지 않는 무한을 진무한으로 설명하고 있다. 결국 진무한은 유한 안에 머물러 있는 무한이므로 유한하다. 유한한 나는 무한한 존재이기도 하며 무한한 나는 유한한 존재여서(유한과의 합일된 무한이 진무한이므로) 나의 존재는 고독하고도 고독하다. 그런데 시인의 고독이 ‘절대고독’과 다른 점은 ‘배양’ 즉 길러지고 있다는 것이다. “【〔고독양식장〕】”은 시인이 울타리를 치고 폿말도 개건 ‘유한 중에 고독’ (진무한) 으로 마침내는 성장한다.

  단단히 마음먹은 후 “그거)”에 도달하려면 “거기)서 배양”된 “돌연변이 고독”을 모두 끌어와 가꾸어야만 한다. ‘체념’이 아니라 ‘배양’은 적극적인 방식으로 고독에 응대하는 것이다. 다만 이 고독은 “개인용이므로 절대 비매품”이라는 단점이 있다. 그러므로 “【〔고독양식장〕】”은 무한하나 유한한 장소이며, 또한 유한한 나의 존재가 무한하게 겪는 치명적인 고독에 도달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극복할 수도 없고, 어쩌면 내가 이미 장악하고 있기도 한, 시인만의 유일무이한 고독이 그곳에서 탄생한다. 그렇다면, 지시어에 괄호가 한쪽만 사용된 것은 방향성 즉 입구는 열려 있으나 출구는 차단된 고독의 ‘정점’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지시어가 가리키는 곳은 뒤쪽이 닫힌, 들어갈 수는 있으나 나올 수는 없는, 또렷한 방향성을 지닌, 나만의, 돌연변이 고독임을 발견하기에 이른다.

 

 

  0℃는 미풍에 섞인다. 먼 데서 일어선 그 바람은 살얼음을 품는다. 수면의 가장자리부터 건드린다. 한 겹, 한 겹씩 발목 잡히는 물결. 중심까지 굳히는 데는 한 계절을 몽땅 걸어야 한다.

 

  지나온 봄여름을, 여름가을을 다 게워야 하지. 겨울도 초입에서는 아니 얼고 한복판에 가서야 꽝꽝 얼 수 있음을… 얼었음을 증명하지. 그래야만 비로소

  

  철새를 부를 수도

  구름들을 헹굴 일도

  햇살 튕겨 낼 물별*도 없지

  그러나 그때 호수는

 

  찢어진 환상

  삼라만상을 떠나

  오롯이 견고가 되어보는 것이다

 

  물이었던 기의를, 물결이었던 기표를, 호수였던 둘레를 그 모두를 응집한 거울, 겨울을

 

  쨍그랑           

  깨뜨려 버려 - - - - - - -

  들녘 가득히 유리 파편이 깔리고, 언덕 촘촘히 유리 파편이 스며들고, 깃털들 다시 살아나고… 비척대고… 저 아래 지느러미로 울부짖으며

  길섶에 문득 솟은 초록들, 새로이 눈뜬 그 부리들을 일일이 어루만지며, 윽 소리 저절로 끓는 살풍경 매번 되풀이로 겪는 호수는 끝없이, 끝없이,

                                                             - 전문, 「얼음 π」

 

   *물별: 물결이 햇빛을 반사할 때 생기는 섬광(필자의 신조어)

 

                                    

  그러므로 “오롯이 견고”가 되는 고독은 겨울 내내 얼어붙은 호수에 파문으로 원주율(π)을 그리는 것이다. π는 단단한 호수가 깨어지므로 모두를 응집하는 둘레를 지니게 된다는 역설에 도달한다. “얼음 π” 형태로 깨어지는 “물이었던 기의를, 물결이었던 기표를, 호수였던 둘레를” 만끽하고 상상한다. 액체에 도달하는 고체의 변신 혹은 고체가 되었으나 액체를 그리워하는 “찢어진 환상”을 시인은 π(원주율의 파문)로 설명하고 있다. 아! “물이었던 기의를, 물결이었던 기표를, 호수였던 둘레”를 깨뜨리는 것으로부터 고독연습은 시작된다! 깨뜨리는 행위는 고체인 얼음을 부정하고 물(액체)이었던 기의를, 모두 응집한 원주율π에 의해 “찢어진 환상”의 삼라만상이 마침내 ‘깨어져’, 쨍그랑 깨뜨려 버린 ‘거울’처럼, 위태롭게 이 ‘겨울’을 빠져나온다. 견고하여 절대 뚫을 수가 없는 것은 고체가 아니라 액체가 된다.

 

 

  녹음~ 흐름~~~

 

  이미 나유타 겁의 경험을 내재한 그

 

  그의 순수는 선천적이라지만, 어느 정도는 경험의 소산일 거야. 그의 전신, 혹은 그의 의식은 어떤 경우에도 (가급적) 대상을 왜곡지 않아.

 

  볕을 만나면 유유히,

  혹한이 스미면 서서히 멈추곤 하지

  그러나 만일 꽁꽁 언 그를 누군가 가격한다면 

 

  물답게. 얼음답게. 즉각적으로. 온몸으로. 대상을-정황을-상황을 흡수하지. 얼핏 부서져 보이지만 그건 수용이야. 온몸으로 받아들인 대상을-정황을-상황을 분석/파악할 수 있게 되지. 깨어진 조각조각 면면마다- 선마다- 비의가 눈떠. 

 

  왜 아프지 않겠는가

  하지만 물은

  사유하는 물이므로

 

  통증을 길쌈하여 맑음을 새기곤 하지. 물은 그렇게 얼었다 녹았다 의문을 풀어 나가지. 그렇게 둥근 지구를 얻고, 별들을 왕래하며 흐르는 봄과 두루미도 데리고 오지. ‘다시 얼면 되니까’, ‘다시 흐르면 되니까’ 늘 한쪽 팔 문질렀지만.

 

  물은 자신과 꼭 닮은 친구도 있지

  화탕지옥 견뎌낸 유리-창, 유리-인형,

  유리-바이올린까지    

 

  그들은 서로 끓었던 얼었던 시공을 기억하지

  그래서 그런 것일까

  설령 원형감옥에 갇힐지라도

  정공법 말고는 거들떠보지도 않지

  - 전문,「얼음은 직선으로 부서진다」 

 

 

  「얼음 π」는 「얼음은 직선으로 부서진다」에 의해 구체적으로 설명될 수 있다(두 시는 함께 읽으므로 완성되는 느낌이다). 물은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의 많은 시간의 수인 나유타를 경험한 고체 이전의 액체로 부서진다(흐른다). 그렇다. 사유하는 물(액체)은 기호의 귀결점인 것이다. 그러나 정숙자 시인이 끝맺고 싶은 시의 세계(완성된 시)는 기호가 아니라 사유인 것을. 시인이 사유로 가는 길목에서 만나는 무수한 기호들은 ‘기시감’과 멀어지게 하여, 시인이 원하는 그만의 사유체계에 도달하는 징검다리가 되어줄 것이다.

 

  그 곳은 분명 내 영역이지만

  나 자신이 모르는 구역이다

 

  뇌 촬영, IQ 검사라면 뭔가 얻을 수 있겠지,만

  그 또한 과학적 가시권의 현상과 한계일 뿐 

 

  그러나 진정 X-영역은 내 행위 일체를 리드/수호하는 요새로서 깊이와 너비, 해수면까지도 존재할 것이다. 거기 보이지 않는 층위에서 나는 일초일순 수정/보완되며 닦였을 것이다. 

 

  X-영역은 내가 조절하거나 들여다볼 수조차 없다. 나는 껍질로서의 실존인가? 그 실재를 우리는 너무도 간단히-편의상 ‘무의식’이라 일컫지만, 그 시스템을 어떻게 규명해볼 것인가.

 

  며칠 전 꿈속에서)

  나는 내 침대에서 잠들었다, 한순간 어떤 손이 내 목을 죄고 있었다. 나는 상대에게 조용히 말했다. "저는 눈뜨지 않았습니다. 당신의 얼굴을 보지 않았습니다. 빨리 나가세요." 

 

  "저는 눈뜨지 않았습니다. 당신 얼굴을 보지 않았습니다. 빨리 나가세요. 전 눈뜨지 않았습니다. 당신의 얼굴을 보지 않았습니다. 빨리 나가세요." 세 번째 되뇌다가 깨어났다.

 

  그 아침, 나는 매우 기뻤다

  생시였다면 그리하지 못했으리라

 

  여태 그래왔을 X-영역

  여생 또한 그렇게 해나갈 X-영역 

 

  내 목숨, 가지러 왔던 악령도 좋았으리라

  제 모습 흘리지 않았으므로

  그리고 그도 그 점 기억하리라

  그이도 나도 좀 더 진화하리라

   - 전문,「엑스영역」

 

 

  “뇌 촬영”이라는 “과학적 가시권의 현상에서 꿈속의 영역과도 같은 X-영역은 논리적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시인은 꿈속의 영역을 “분명 내 영역이지만/ 나 자신이 모르는 구역”으로 규정짓고 있다. 보이지 않는 층위(꿈)에서 잠식당하는 경험은 그곳에서(꿈) 깨어나는 순간 비로소 안도한다. 그러나 ‘나’이면서도 내가 관여하기 어려운 ‘X-영역’이야말로 인류의 진화를 가져오는 과학의 불투명한(모호한) 영역임을 증명하는 것이기도 하다. 한계(꿈의 영역)는 결코 과학으로 설명될 수 없는 미지수의 ‘X-영역’이다.

  이쯤에서 되돌아보니 정숙자 시의 변화는 신작시와 함께 실린 「시인과의 대담」에서 시인이 표현하고 있는 “기시감”으로도 충분히 설명되는 것만 같다. 에둘러왔지만, “기시감”에 대한 확고한 생각을 가진 정숙자 시인은 “흔히 봐오던 내용이나 문투”를 꺼리며 “전인미답의 지평을 열어 보이는 시”를 목표로 삼아, “기교와 스토리가 알맞게 구사되어 새로우면서도 마음 깊숙이 찔리는” 시를 쓰고자 하는 시인의식을 스스로 밝히고 있다. 이 점은 매우 중요한 정숙자 시인의 시적 발로일 것이다. 결국 정숙자 시인에게 ‘기호’는 “기시감”을 극복하는 새로운 언어의 형태이자 시적 기능을 유감없이 발휘하는 창조적인 신조어新造語로 인식되고 있다.  

 

  * 블로그 註: 시집『공검 & 굴원』에 수록되지 않은, 한 편 =「엑스영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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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사사』2019. 3-4월호 <포커스>에서

  * 정숙자/ 1988년 『문학정신으로 등단』

  * 전해수/ 문학평론가. 평론집『목어와 낙타』『비평의 시그널』, 현재 숭실대 HK연구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