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둘기와 살았던 날의 기억
김왕노
다행히 비둘기와 살았던 기억이 내게는 있어. 모든 천한 것의 발밑
까지 내려 앉아 평화의 상징이나 온순함이란 대명사를 버리고 누구
는 우주의 장례를 외치고 종말의 날을 말하지만 낱알 하나에도 고
개를 공순히 내리고 쪼아대던 비둘기와 비둘기 마음으로
비가 오면 젖은 날개로 처마 밑에 앉아 구구대던 비둘기와 함께 산
날이 있어. 비둘기의 종종 걸음으로 구절양장 같은 세월을 걸어간
적 있어. 키 낮은 팬지며 봄나물이며 관목 숲이며 별을 더 아득히
바라보는 것이 정이 많다는 것을, 더 아득한 곳으로 향하던 것도 결
국은 날개 접고 돌아오는 곳이 비둘기 꿈 아름다운 지상 어디 거처
라는 것
나 비둘기와 함께 운 날도 있어.날 저물고 모든 게 저물어 비둘기
마저 부리 묻고 잠들 때까지 울음마저 잠 들 때까지 짓무른 눈으로
운 적이 있어. 유통기한이 지난 것 같은 모습으로 비둘기가 선회하던
날 난 비둘기와 산 적이 있어. 그 때 슬픔에 세 들어 살았던가. 웃음
보다 한숨이 많아도 청춘의 비문 새기며 비둘기 깃털 후후 불며 산
적이 있어
누구나 다 비둘기가 되어 구구구 대자고 다시 평화의 상징이나 되
자고 그러자고 비둘기 앙가슴으로 비둘기와 살았던 날의 기억이 있
어
*<시와미학> 2011.가을호(창간호) / '신작'에서
*김왕노/ 경북 포항 출생, 1992년<매일신문>신춘문예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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