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해항로 1
-악공樂工
장석주
누가 지금
내 인생의 전부를 탄주하는가.
황혼은 빈 밭에 새의 깃털처럼 떨어져 있고
해는 어둠 속으로 하강하네.
봄빛을 따라간 소년들은
어느덧 장년이 되었다는 소문이 파다했네.
하지 지난 뒤에
황국黃菊과 뱀들의 전성시대가 짧게 지나가고
유순한 그림자들이 여기저기 꽃봉오리를 여네.
곧 추분의 밤들이 얼음과 서리를 몰아오겠지.
일국一局은 끝났네. 승패는 덧없네.
중국술이 없었다면 일국을 축하할 수도 없었겠지.
어젯밤 두부 두 모가 없었다면 기쁨도 줄었겠지.
그대는 바다에서 기다린다고 했네.
그대의 어깨에 이끼가 돋든 말든 상관하지 않으려네.
갈비뼈 아래에 숨은 소년아,
내가 깊이 취했으므로
너는 새의 소멸을 더듬던 손으로 악기를 연주하라.
네가 산양의 젖을 빨고 악기의 목을 비틀 때
중국술은 빠르게 주는 대신에
밤의 변경邊境들은 부푸네
- 전문-
▶ 꿈의 철학자, 소년을 만나다_몽해항로, 제3의 지대를 꿈꾸며(발췌)/ 금은돌
"누가 지금 내 인생의 전부를 탄주하는가"라는 첫 문장은 절벽 위에서 코기토(Cogito)와 직면하는 대목이다. 시인은 여기서 철학자가 되고자 한다.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은 "탄주"라는 시어가 놓인 맥락이다. 시인은 절벽 위에서 내려다본다. 그곳에서 바라보니, 그토록 비극적이었던 세상이 담담해 보인다. "곧 추분의 밤들이 얼음과 서리를 몰아오겠지." "중국술이 없었다면 일국을 축하할 수도 없었겠지." 추측을 의미하는 서술어로 세상사와 거리를 유지한다. 체념의 어조이다. 체념은 포기를 말하기도 하지만, 내가 할 수 없는 것을 내려놓는 깨달음이기도 하다. 체념은 시적 주체를 놓아준다. 불확실성과 우연에 자기 자신을 내맡긴 것이다./ 문득 소년이 등장한다. 그 소년은 "갈비뼈 아래 숨"어 있다. 소년은 누구인가? 제도 교육을 거부했던 소년, 아버지에게 반항했던 아들, 권위적인 학교 대신 도서관에 틀어박혀 책을 읽던 아이, 시인을 꿈꾸며 홀로 글을 쓰던 장석주 시인의 또 다른 주체이다. 내면 깊숙이 억눌려있던 어린 소년이다.// 코기토에 대한 의문을 던지는 순간, 소년을 발견한 것은 사뭇, 의미심장하다. 이 장면은 곧바로 프리드리히 니체가 "어떻게 하여 정신이 낙타가 되고, 낙타는 사자가 되며, 사자는 마침내 아이가 되는가를" 설명했던 대목과 겹쳐진다. 니체는 낙타의 단계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인내심 많은 정신은 무거운 짐을 잔뜩 지고 있다. 정신의 강인함은 무거운 짐을, 가장 무거운 짐을 요구하는 것이다." 낙타는 "짐을 짊어지고 그의 사막을 달린다." 두 번째 변화는 사자 단계이다. 사자의 "정신은 자유를 쟁취하려 하고 사막의 주인이 되고자 한다." "정신은 최후의 신에게 대적하려 하며, 승리를 위해" "거대한 용과 일전을 벌이려 한다." 사자는 새로운 것을 창조하기 위해 자유를 획득해야 하고, 미혹迷惑과 자의姿意를 찾아내야 한다.(프리드리히 니체,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정희창 옮김, 민음사, 2008, 35-38쪽) 시인은 자유를 쟁취하기 위해 소년을 절벽으로 내몰고 주변을 베어버리며 자신만의 결의를 다져왔다. 잠재의식 속에서 상징 동물이 출현하고, 그 목소리에 충실하며 사막의 주인이 되고자 했다. 이러한 시 세계의 흐름에 "세 가지 변화"가 맞물려 있다. 니체가 말했던 사자 단계는 호랑이라는 상징적 동몰로 치환되어 나타났던 것이다. (p.詩.177-178 / p.論.179-1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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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은돌 평론집『한 칸의 시선』(시작 비평선 0017) 에서/ 2018. 8. 13. <천년의시작> 펴냄
* 금은돌/ 그림 그리며 글 쓰는 사람이다. 2008년『애지』로 평론 부문, 2013년『현대시학』으로 시 부문 등단, 연구서『거울 밖으로 나온 기형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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