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착하는 빛
이혜미
눈을 뜨자 빛들이 태어났다
간밤에 그림자를 놓아두고 떠난 이가 창밖에 서렸다 얽혔던 꿈의 다발들을 잘 개어 포개놓으면 회오리치며 잦아드는 밤, 사람을 향해 출발했던 빛점들이 아직 먼 광년 속을 헤매이는지
도달할 행성에의 예감으로 눈빛은 진동한다 속눈썹을 타고 길게 날아오르는 빛의 무리들이 가 앉을 정처를 찾을 때 풍경이 탄생한다고, 어둠 속에서 문득
솟구치는 마음처럼
어둠을 품었던 방을 뒤집어 환한 구球를 얻으면 흔적으로만 도달할 수 있는 세계도 있겠지 잠든 눈가에 몰래 진창이 고이듯, 당겨진 눈시울에 먼 빛이 와서 일렁이듯
사라져 더욱 선명해지는 빛들도 있겠지, 물기 어린 행성을 잘 씻어 볕 드는 창가에 놓아두면 감은 두 눈 위로 일렁이던 사람의 윤곽
- 전문-
▶ 눈동자라는 질문, 세상에 던지는 의문_빛을 품은 행성, 눈동자의 세계(발췌)/ 금은돌
첫 행, "눈을 뜨자 빛들이 태어났다"는 구절은 인간이 빛에 의해 수동적으로 눈을 뜬다는 설정을 뒤집는다. 빛이 거기에 있기에 눈이 있는 것이 아니라, 눈이 있기에 빛이 태어난다. 빛은 존재의 원천이다. 인간은 태양을 신처럼 숭배해 왔고, 신은 인간의 몸에 빛을 장착하였다. 중국의 반고 신화만 보아도, 하늘과 땅이 달라붙을까 염려하여, 하늘을 떠받치고 있던 반고가 지상에 쓰러졌을 때, 왼쪽 눈동자는 태양으로, 오른쪽 눈동자는 달이 되었다. 빛은 눈동자 안으로 스며든, 원초적으로 충만한 에너지이다. 눈동자는 스스로 빛낼 수 있는 반딧불이와 같다. 스스로 빛을 내는 램프이고, 스스로 빛을 먹는 플랑크톤이다./ 빛은 능동적으로, 위치한다. 거기에 행동이 가미된다. 주체의 의지가 담긴 '뜨다'라는 행위를 통해 빛은 빛난다. 저 우주의 먼 행성에서 시작되었을지 모르는 빛은, 파릇파릇 우리 안에 존재하기에, 눈을 뜨자 빛이 발아하며 생동한다./ 시인의 상상력은 인간이라는 존재 역시, 빛을 뿜어내는 행성이라는 가능성을 품는다. 행성은 발사되고, 행성은 공전하고, 행성은 제 그림자를 뒤로하고 어느 곳에 당도한다. 바라본다는 것은 사실, 이미 알고 있음이다. 시인의 바라봄은 특히나, 예언적인 감지 능력을 지닌다. 도달할 지점이 어디인지, 그 파장과 촉감과 진동을 미리 알고, 눈빛이 떨린다. 시선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고민하다, 시선이 내려앉을 곳을 찾았을 때, 빛이 눈시울의 안정된 지점에 와서 머무른다. 이 과정은 누구나 일상적으로 겪는 시선의 자리이다. (p.1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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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은돌 평론집『한 칸의 시선』(시작 비평선 0017) 에서/ 2018. 8. 13. <천년의시작> 펴냄
* 금은돌/ 그림 그리며 글 쓰는 사람이다. 2008년『애지』로 평론 부문, 2013년『현대시학』으로 시 부문 등단, 연구서『거울 밖으로 나온 기형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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