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사람
이영옥
당신의 뒷모습은 갈수록 아름다워서 얼굴이 생각나지 않는다
편의점 앞에 반쯤 뭉개진 눈사람이 서 있다
털목도리도 모자도 되돌려주고
코도 입도 버리고 눈사람 이전으로 돌아가고 있다
순수 물질로 분해되기까지
우리는 비로 춤추다가 악취로 웅크렸다
지금은 찌그러진 지구만한 눈물로 서 있다
눈사람이 사라져도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눈사람이 섰던 곳을 피해 걷는 것
당신을 만들어 나를 부수는 사이
뭉쳤던 가루가 혼자의 가루로 쏟아졌던 사이
사람은 없어지고 사람이 서 있던 자리만 남았다
우리가 평생 흘린 눈물은 얼마나 텅 빈 자리인지
- 전문-
▶ 뒷모습의 세계 혹은 공간의 수사학(발췌)_ 전해수
"눈사람"이 녹아 "사람"을 버리고 "눈"으로 되돌아가는 과정을 공간의 이동으로 표출하고 있는 위 시는 이별의 쓸쓸함이 '뒷모습으로 멀어진다는 것의 쓸쓸함'으로 투시된다. 눈사람이 녹아 사라진다는 것은 얼굴을 잃고 뒷모습처럼 '멀어진다'는 의미로 재해석되어 그 (텅 빈) 자리만이 오롯이 남겨지고 이 (텅 빈) 자리가 바로 시간과 함께 들이닥친 공간의 변화를 예견하게 된다. 시인은 이 변화된 자리를 "사람은 없어지고 사람이 서 있던 자리만 남"은 '눈'의 공간으로 다시 설정하고 있다. 시인은 눈사람이 사람을 버리고 눈으로 되돌아간 지점을 바로 적시해낸 것이다./ 사람을 잃은 텅 빈 자리 때문에 평생 흘린 '눈물'이 '물'을 잃고 '눈'만 남아 고작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눈사람이 섰던 곳을 피해 걷는" 일일 뿐이라는 인식 또한 시공간의 변화 즉 이별로 인해 사랑하는 대상을 잃고 눈물을 얻은 시간과 달라진 공간 앞에 놓여 있음을 바라본다. 이별은 이처럼 '사람'을 잃거나 눈물로 여울진 '눈'의 일만이 남겨지는 (이전과는 시공간이 판이하게 달라진) 모진 경험이 되고 만다./ 그러나 눈사람도 따지고 보면 눈이라는 순수물질로 만들어져 코도 입도 털목도리도 모자도 얹어주면 얼굴을 가진 (눈)사람이 되는 것인데, "당신을 만들어 나를 부수는" 일과 지금은 "찌그러진 지구만한 눈물"로 밖에는 남지 않은 일 "사이"에서 "우리는 비로 춤추다가 악취로 웅크린" 시절을 견뎌왔음을 비로소 기억해 내야 한다. 여기서 기억이란 이별이 남긴 텅 빈 자리를 견뎌내는 또 다른 아픔이 된다. (p.78~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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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해수 평론집『비평의 시그널』(포지션 비평선 001) 에서 / 2018. 5. 18. <포지션> 펴냄
* 전해수(본명: 전영주)/ 1968년 대구 출생, 2005년 『문학선』으로 평론 부문 등단, 논문집 『1950년대 시와 전통주의』, 평론집 『목어와 낙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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