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
김왕노
전방의 한탄강이 보이는 언덕에 차량사고로 죽은 김 하사의 어린 아내, 아기를 업고 나와 울고 있으니 가보라는 감성이 예민한 옛 전우가 귀띔을 해왔다.
남의 말을 곧이곧대로 잘 믿는 편이라 열 일 제쳐두고 철원행 버스를 타고 택시를 타고 수통에 물 담아 먹던 한탄강가에 가니 차량사고로 한날한시에 죽은 김하사와 성산이 현석이가 물새가 되어 울고 있었다.
그때 언덕을 보니 알 수 있었다. 옥수수 대가 옥수수를 매달고 있는 것
이 옥수수가 아니라 김 하사의 젊은 아내였다. 그리움의 뿌리가 밑둥치에서 뻗어내려 한탄강에서 김 하사 살아 돌아오길 기다리려는 듯 철원의 땅을 단단히 움켜쥐고 있었다. 비바람에 젖어 번들거리면서도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있었다.
한 번쯤 아기를 추스른다고 가슴에 품고 젖을 물려야 하나 실성한 듯 아기를 업고 오발사고로 자살로 전우가 죽은 전방의 아픈 이야기 위에서 서성거리고 있었다.
젊었으니 아기를 친정에 맡기고서 재가해 잘 살고 있으리라 믿었는데 밤이면 살아나는 풀벌레 소리 한탄강 구슬픈 물소기 속에 넋 잃고 서 있다니
찬 서리 내려 발이 시려 울 텐데도 등에서 내려놓지 않아 뚝뚝 따서 처마밑으로 데려갈 아기 옥수수, 폭염에 노랗게 잘 익은 씨 옥수수 몇 자루에 알알이 박힌 기억, 내년 여름이면 또 옥수수로 돋아나 푸르러질 날을 운명의 날이라 불러 보는 것이다.
내년 여름이면 한탄강을 다시 찾은 나는 달래도 달랠 수 없는 망부의 한을 멀리서 지켜보며 울먹이기나 할 것이다.
-전문, 『시와정신』2017. 가을호
▶ 눈 덮인 진흙 밭을 밟는 기러기(발췌)_ 서대선/ 시인
배우자의 죽음을 마주하는 것에는 개인차가 크다. 사랑하는 사람의 상실이라는 슬픈 감정에서 회복되는 시기는 최소 1-2년 이상이 필요하며, 살아남은 사람이 예전상태로 돌아가는 것은 사실 불가능한 것이다. '예전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인정하고, 상실된 상태를 안고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김 하사의 어린 아내"는 아직도 남편의 죽음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애도의 모든 단계를 넘어서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한 번쯤 아기를 추스른다고 가슴에 품고 젖을 물려야 하나 실성한 듯 아기를 업고 오발사고로 차량사고로 자살로 전우가 죽은 전방의 아픈 이야기 위에서 서성거리고 있"는 것이다.
Stroebe & Schut(1999)는 사별에 대한 대처 전략인 이중과정 모델에서 상실 그 자체를 다루는 것에 초점을 두는 방식과 새로운 삶에 적응하기 위한 회복에 초점을 맞추는 방식으로 사별에 대한 대처를 구분하여 연구하였다. 이 두 가지 방식은 서로 순환하는 역동적인 과정이라고 보고하였다. 즉, 사별 이후 그와 관련된 생각이나 기억들로 슬픔에 마주하기도 하지만 여기에 머무르지 않고, 사별에 대한 생각을 최소화하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려는 노력을 기울인다는 것이다. 따라서 사별은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긴 혼란과 슬픔, 노력과 과정을 겪으면서 적응해 나가는 것이라고 하였다.
"찬 서리 내려 발이 시려 울 텐데도 등에서 내려놓지 않아 뚝뚝 따서 처마 밑으로 데려갈 아기 옥수수, 폭염에 노랗게 잘 익은 씨 옥수수"
남편이 죽은 "한탄강"가에서 시린 발로 서성이며 울고 있는 기러기 같은 "김 하사의 어린 아내"를 안타깝게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김 시인은 문득 "언덕 위에서 옥수수를 매달고 있는 옥수수 대" 속에서 김 하사의 유전자를 그대로 간직한 어린 아기를 업고 있는 김 하사의 어린 아내의 모습을 투사한다. 그녀는 결코 김 하사의 자식을 두고 먼저 세상을 버리지는 않을 것이라고 믿어보는 것이다. 여자는 약해도 어머니는 강하다고 하지 않았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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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대선 평론집『히말라야를 넘는 밤 새들』(포엠포엠 Books 011) 에서/ 2019.1.10. <포엠포엠> 펴냄
* 서대선/ 2013년『시와시학』으로 등단, 시집『천 년 후에 읽고 싶은 편지』(2009), 『레이스 짜는 여자』(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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