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한 편

이태동_해외수필 읽기/ 질그릇의 덕(陶罌賦) : 이규보

검지 정숙자 2018. 7. 26. 00:29

 

 

<해외수필 읽기 19/ 이태동: '해외수필 읽기'이지만 이번 여름호에는 우리나라 고려 중기의 문신이며 문인(1168-1241)인 이규보李奎報 의 글을 소개해 본다. 이규보의 자는 춘경春卿, 호는 백운거사白雲居士 · 지헌止軒 · 삼혹호선생三酷好先生이다. 벼슬은 정당문학을 거쳐 문하시랑평장사 등을 지냈다. 이규보는 경전經典과 사기史記와 선교禪敎를 두루 섭렵하였고, 호탕 활달한 시풍은 당대를 풍미하였으며 명 문장가였다. 저서에 『동국이상국집』『백운소설』 등이 있다.

 

 

    질그릇의 덕[도앵부陶罌賦]

 

    이규보

 

 

  내가 질항아리 하나를 가졌는데 술을 담아 놓으면 그 맛이 변치 않으므로 매우 소중히 여기고 아낀디. 또 내 마음속에 느끼는 점이 있기에 부를 지어 노래한다.

 

  내게 조그마한 항아리가 한 개 있다. 쇠를 불려서 만들거나 녹여서 틀에 부은 것이 아니라 흙을 반죽하여 불에 구워 만든 것이다. 목은 잘록하고 배는 불룩하며 주둥이는 나팔처럼 벌어져 있다. 영瓴(귀가 달린 작은 병)에 비하면 귀가 없고, 추甀(주둥이가 작은 질항하리)에 비하면 주둥이가 다소 크다.

  닦지 않아도 항상 칠한 것처럼 검은 광채가 난다. 어찌 금으로 만든 그릇이라야만 보배로 여기랴. 비록 질그릇이지만 저처럼 고귀하다.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아서 한 손에 들기에 알맞고, 값도 매우 싸서 구하기가 또한 쉽다. 설령 깨진다 하더라도 뭐 그리 아까워할 것이 있겠는가. 양도 그리 크지 않아 한 말의 술을 담기에 알맞다. 가득히 담아 놓아도 맛이 언제까지나 변하지 않고, 비워지면 다시 얼마든지 채울 수 있다. 흙으로 만든 것이 저렇게 정교하여 변하지도 않고 또 새지도 않는다.

  가로퍼졌기 때문에 술을 담기도 편리하고 붓기도 편리하다. 그러기 때문에 엎어져 뒤집어질 염려도 없고…….

  일생을 통해서 담고 또 담아 몇 섬의 술을 담았던가. 군자君子의 마음과 같아서 자존自尊을 버리고 얼마든지 받아들이는 겸허의 덕이 있구나. 소인小人들의 꼬락서니를 보니 재물만을 생각하여 좁은 기량器量을 가지고 공포에 떤다. 가히 있을 양을 가지고도 무진한 욕망을 취한다. 많이 담아 놓고도 그것을 비우거나 해산하지 않으며 오히려 양이 협소하다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자그마한 그릇은 쉽게 차고 금방 넘친다. 나는 이 때문에 늘 이 술항아리를 앉아 있는 자리의 오른쪽에 놓아두고 때로 보고 느껴, 너무 많이 차서 넘치게 되는 것을 경계한다. 타고난 분수에 맞추어 한평생을 보내며 무궁의 복록福祿을 누리련다. (장덕순 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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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예바다』 2018-여름<해외수필 읽기 19>에서

  * 이태동/ 문학평론가, 서강대명예교수, 평론집 『나목의 꿈』『한국 현대시의 실체』등, 수필집『살아 있는 날의 축복』『우리를 기쁘게 하는 것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