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한 편

고독이 아늑해지면/ 김제김영

검지 정숙자 2018. 7. 29. 18:39

 

 

    고독이 아늑해지면

 

     김제김영

 

 

  푸석푸석한 빈들이다. 바람은 심술궂고 흙먼지는 아우성친다. 옷자락은 써걱거리고 눈은 따갑다. 반지레한 풀잎은 어디에도 없다. 바위라도 만나면 다리쉼이라도 할 수 있으련만, 무작정 쉬지 않고 걸어야 한다. 아무리 걸어도 목적지는 가까워지지 않는다. 잎사귀를 다 떨어뜨린 나무들은 앙상하다 못해 추레하다. 물은 어디쯤에 있을까? 멀리 윤곽만 희미하게 보이는 산을 향해 무작정 걸을 뿐이다. 거리는 좀체 좁혀지지 않는다.

 

  태양이 나를 무두질한다. 이 들판을 다 건너 저 산에 안착하고 싶다는 나의 패기를 시나브로 폐기시켰으나, 그럴수록 산에 들 수도 있으리라는 상상이 그악스레 찾아와 자주 몸살이 났다. 방향을 일러주는 어떤 표지도 없었으므로 산을 향해 끝없이 걷는 매일이다.쉽게 닿고 싶은 조급함이 종종 찾아오지만 한 발 한 발 정직하게 내딛는 걸음 외에 어떤 도구의 힘도 기대지 않기로 한다. 너무 많은 눈을 갖지 않기로 한다.

 

  바람이 불지 않았다면 나는 벌써 주저앉았을 것이다. 눈을 감고 바람의 냄새를 맡는다. 바람이 실어오는 먼 곳의 독백들을 듣는다. 모아지지 않고 뭉쳐지지도 않던 음소들이 먼 곳의 소식들을 읽는 동안 점성을 갖는다. 바람이 실어온 유려한 문장들처럼은 아니어도 나만의 말문이 트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옹알이마다 조사를 붙여주면 문장 어깨마다 튼실한 날대가 돋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지평선에 커다란 달이 뜬다. 착시라 하더라도 저 달이 커다랗다는 사실은 내겐 확실한 진실이다. 반 토막은 새벽까지 남아 나와 함께 밤을 지낸다. 지구 저쪽으로 훌쩍 사라진 반 토막은 나의 좌절과는 무관하다. 이 들판을 다 건너가면 나도 말문이 좀 트일까? 멀리 보이는 거대한 산도 이 들판의 일부분이라는 명제를 깨달을까? 그 새는 저 산에만 사는 걸까?

 

  산에 집착하던 눈길을 거둔다. 폴폴 날리는 흙먼지를 간신히 그러모아 맹렬하게 싹을 틔우는 풀꽃들이 지천이다. 화려하지 않고 빼어나지 않지만 풀들도 꽃을 피운다. 황량하던 들판이 색을 갖기 시작한다. 가만히 앉아 생각에 집중한다. 나무는 나뭇잎을 어떻게 마련했을까? 시궁쥐는 무엇으로 새끼를 기름지게 키우는가? 저 꽃은 왜, 드높은 하늘보다 척박한 땅바닥을 더 자세히 받아 적을까? 나도 저 산에 들어 그 새를 만날 수 있을까?

 

  집 지을 재료들을 모았다.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그러나 꼼꼼하게 재료의 쓰임새를 파악했다. 삭은 가지는 삭은 대로, 방금 솟은 풀잎은 싱싱한 그대로 활용한다. 이제 막 탄력을 갖기 시작한 몇 개의 단어를 얼기설기 붙잡아 맨다. 집 짓는 기술을 습득하지 못했지만 조심스레 한 층 한 층 벽돌을 올려본다. 미완성이 완성인 집을 죽는 날까지 짓기로 작정한다.

 

  바람을 기다렸다. 그가 전해주는 독백들는 내가 집을 짓는 참고서였다. 가끔씩 먼 곳의 계절을 읽기도 했다. 어머, 꽃이 비처럼 쏟아지다니? 그 많은 꽃은 누가 다 피웠을까? 잠깐씩 내 남루를 잊고 흥분하기도 했다. 이따금 벽이 흔들릴 때마다 초라한 집 짓기를 그만두고 다시 길을 떠나고 싶은 적도 많았다. 하지만 새를 위한 기도를 다시 시작한다.

 

  사람을 만날 수 없었으므로 혼자서 오래 고독했다. 영혼의 구석구석을 샅샅이 뒤져 문장을 빚었다. 그리고 언어의 집을 짓기 시작했다. 나 혼자만 해독할 수 있는 두런거림으로 지은 집은 아무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다. 고독이 새의 서식처인 걸 뒤늦게 알아 챈다.

 

  아침이슬, 한낮의 태양, 새벽별, 저녁노을 이런 것들을 모시고 적바림했다. 나뭇잎이 바람을 읊는 소리와 발 많은 곤충이 부지런히 찍어주는 발자국을 베껴두었다. 풀꽃이 열리는 순간과 아주 작은 풀씨가 온힘을 다해 뛰는 모습을 가슴에 담아두었다. 이윽고 새가 보이기 시작했다. 볼 수도 없었고 만질 수도 없는 새는 집의 마지막 단계였다. 아침햇살을 여기저기 나르는 강아지풀도 쓰다듬어 주었다. 이런 것들이 새의 변용이라는 것을 알아챌 때마다 나는 두근거렸다.

 

  가난하지만 따뜻한 집을 짓기 시작했다. 멀리 있는 큰 산은 멀리 두고 우러르기로 했다. 집 앞 작은 개울은 이슬과 잉크로 채우기로 했다. 원고지 칸칸마다 욕심을 부리다가 집이 무너지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조용히 기다린다. 새가 날갯짓하는 방향으로 하루 종일 귀 기울인다. 꿰맨 자리 없이, 덧댄 자리 없이 자유자재로 들락거리는 저 새를 나는 언제쯤 편안히 대할 수 있을까?

 

  잠을 자는 중에, 밥을 먹는 중에, 아무런 예고 없이 새가 날아든다. 하지만 제대로 받아쓰지 못한다. 집 짓는 작업이 날이 갈수록 두렵고 어렵기만 하다. 마음과는 달리 허술하게 지어진 집을 참담하게 뒤적거린다. 그럴 때마다 새는 어디론가 사라져버린다. 고독에 깃들기 좋아하는 새의 습성에 맞추느라 나는 늘 고독을 마련한다. 책상을 닦는다. 연필을 깎는다. 내 고독이 충분히 아늑해지면 그때, 나에게도 새가 머물러 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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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문학인』 2018-여름<기획특집|새는 내 작품 속으로 어떻게 날아오는가>에서

  * 김제김영1996년 시집 『눈감아서 환한 세상』으로 작품활동 시작, 시집 『나비편지』『다시 길눈 뜨다』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