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릎이 없는 한철
최형심
그리움도 한철, 나의 저녁을 거니는 바람이 더는 미풍이 아니다. 너
없는 하루는 천년처럼 침묵하여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데 또 한 해가 졌
다. 발아래 가을은 넘쳐도 내내 여물지 못해 거리에서 한철 바람에 기댈
뿐, 상처 없는 꽃은 없다. 소음과 고요 사이 은단풍나무가 소진한 열병
이 붉다. 벽을 기는 잎들은 모가지를 떨군다.
옛집 문고리를 놓고 가는 바람의 손목을 붙잡고, 안쪽의 울음을 당겨
홀로 단단해지고 싶었다. 낯선 말들이 발등을 스쳐가고 숨바꼭질에 지
친 여우볕이 잠든 그곳, 나는 어떤 절기(節氣)로 다가가 당신을 움트게 했
나. 날것의 그늘로 보랏빛 저녁이 달려든다. 뒤란을 돌아 나오는 그을음
묻은 저녁바람은 그렇게 나를 불러 세웠다.
혼자 가늠하는 두 저녁 사이의 뼈. 나는 무릎으로 우기(雨氣)에 이르러,
당신의 맨발을 기억했다. 당신의 눈동자는 붉다, 아니 따스하다. 누구의
이마를 빌어 겨울눈을 새길까, 다시 깨어나야 하는 잠이 쓰다. 이 모든
통증을 쓰다듬으며 나는 또 저물어간다.
*『현대시』2011-6월호 <신작특집>에서
* 최형심/ 부산 출생, 2008년『현대시』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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