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뎅이-꽃가루*
유미애
깨진 피리를 만지면 울음소리들이 일어선다
꽃가루는 가슴 중앙, 소리가 멈춘 곳에 있었다
들것에 실려 온 소년은 굴 속에 누워 천천히 귀를 접었을 것이다
벌레들이 짧은 생을 복사하는 동안
마지막 해와 달을 눈동자에 심으며 고요해져 갔을 것이다
풍뎅이 문신을 하고 온몸의 문을 닫는다
마흔이 넘도록 나는 귀를 다스리지 못했다
낯선 악보를 읽는 입술에 불꽃이 일 때, 소년은
동굴 같은 방, 내 거친 어둠으로 건너와 피리를 분다
풍뎅이가 날개를 펴면 꽃의 성체가 깨어나고
한 줌, 꽃가루를 눈에 넣고 귀가 밝아진 나는
가루가 된 음들이 악기 속으로 돌아올 때까지
오래된 피리 소리로 그림자를 닦는다
아랫입술에 겹쳐지던 향기가 희미해져갈 때
굴 밖, 어지러운 도시의 불빛과 방의 숨소리
풍뎅이를 모두 날리고 다시 어두워진 나는
온전히 복원시키지 못한 이름 위에 피 한 접시를 뿌린다
첫 국화가 다녀간 빈손을 꼭 쥔 채
귀를 빠져나가는 시간의 울음덩이를 지켜본다
-전문-
* 청원 두루봉 동굴에서 발굴된 구석기 시대의 화석. 국화꽃으로 추정되는 꽃가루가 함께 발견되었다고 함
▶ 감각의 복원 그리고 실패(발췌)_ 현순영
이 시는 '나'가 이른바 '흥수아이'를 보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흥수아이'에 관해 여기서 굳이 설명한 필요는 없을 것이다. 다만, 그 아이의 모습은 그야말로 우리의 '원래' 모습을 어느 정도 추정하게 해준다는 점, 성별이 밝혀지지 않은 그 아이가 이 시에서는 '소년'이라 명명된다는 점은 말해둘 필요가 있겠다. 중요한 것은 이 시에서 소년은 '나'를 통해, '나'는 소년을 통해 복원되며 그 복원은 감각의 복원이라는 사실이다.
'나'는 소년의 생명이 사그라지는 과정을 그려본다. "들것에 실려 온 소년은 굴 속에 누워 천천히 귀를 접었을 것이다/ 벌레들이 짧은 생을 복사하는 동안 마지막 해와 달을 눈동자에 심으며 고요해져 갔을 것이다". 생명이 사그라지는 과정은 감각이 서서히 멈추는 과정이다. 귀가 스스로를 접어 청각을 멈추는 과정, 눈이 스스로를 감아 시각을 멈추는 과정이다. 그런데 '나'는 깨진 피리를 만져 울음소리들을 일으켜 세워 소년을 깨운다. 그 울음소리들은 소년의 짧은 생을 복사했던 벌레들의 울음소리, 소년의 가슴에 국화꽃을 올리고 고개 숙여 울었을 사람들의 울음소리, 어쩌면 소년의 울음소리일 수도 있다. 소년은 그 소리에 깨어난다.
깨어난 소년이 '나'에게로 온다. 그러나 그것은 낯선 악보를 읽는 '나'의 입술에 불꽃이 이는 아주 잠깐 동안의 일이다. 그때 소년은 동굴 같은 방, "'나'의 거친 어둠으로 건너와 피리를 분다. 풍뎅이는 소년의 변신變身인가? 악보를 읽는 '나'에게 소년이 피리를 불어주는 것은 마치 꽃의 성체成體인 풍뎅이의 꽃가루가 '나'에게 수분受粉하는 것과도 같다. 그 수분이 '나'의 감각을 바룬다는 것이 중요하다. '나'의 감각은 온전치 못했다. 그것은 '나'가 어둠 속에 있다는 진술로서 이미 뒷받침되었다. '나'는 동굴 같은 방, 거친 어둠 속에 있다. 볼 수 없다. 어떻게 악보를 읽나. '나'가 읽는 모든 악보는 그래서 낯선 악보다. 게다가 '나'는 마흔이 넘도록 귀를 다스리지 못했다. 잘 듣지 못해 왔다. 아니, 들어서는 안 될 것까지 들어 왔다. 그런데 꽃의 성체인 풍뎅이의 한 줌 꽃가루로 '나'의 감각은 되살아나고 바루어진다. 꽃가루로 '나'의 시각, 청각, 후각, 모든 감각이 연동하고 통합된다. '나'는 꽃가루를 눈에 넣고 귀가 밝아진다. 아랫입술에는 향기가 겹쳐진다. 게다가 '나'의 어떤 기억, 그림자로 남은 이름마저도 되살아난다.
그러나 어둠만은 극복할 수 없는 것인가? 낯선 악보를 읽을 때 '나'의 입술에 일던 불꽃은 사그라지고 동굴 같은 방 밖, 어지러운 도시의 불빛마저도 사라진다. 어둠은 풍뎅이를 날려버린다. '나'는 온전히 복원되지 못한다. 이것이 진실이다. (p.116~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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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순영『응시와 열림의 시 읽기』(서정시학 비평선 38) 에서 / 2018. 1. 22. <서정시학> 펴냄
* 현순영/ 제주 출생, 20013년 『서정시학』으로 펑론 부문 등단, 저서 『구인회의 안과 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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