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집 속의 시

뿌리로부터/ 나희덕

검지 정숙자 2018. 5. 18. 00:49

 

 

    뿌리로부터

 

    나희덕

 

 

  한때 나는 뿌리의 신도였지만

  이제는 뿌리보다 줄기를 믿는 편이다

 

  줄기보다는 가지를,

  가지보다는 가지에 매달린 잎을,

  잎보다는 하염없이 지는 꽃잎을 믿는 편이다

 

  희박해진다는 것

  언제라도 흩날릴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

 

  뿌리로부터 멀어질수록

  가지 끝의 이파리가 위태롭게 파닥이고

  당신에게로 가는 길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한다

 

  당신은 뿌리로부터 달아나는 데 얼마나 걸렸는지?

 

  뿌리로부터 달아나려는 정신의 행방을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허공의 손을 잡고 어딘가를 향해 가고 있다

 

  뿌리 대신 뿔이라는 말은 어떤가

 

  가늘고 뾰족해지는 감각의 촉수를 밀어올리면

  감히 바람을 찢을 수 있을 것 같은데

  무소의 뿔처럼 가벼워질 수 있을 것 같은데

 

  우리는 뿌리로부터 온 존재들,

  그러나 뿌리로부터 부단히 도망치는 발걸음들

 

  오늘의 일용할 잎과 꽃이

  천천히 시들고  마침내 입을 다무는 시간

 

  한때 나는 뿌리의 신도였지만

  이미 허공에서 길을 잃어버린 지 오래된 사람   

    -전문, 『뿌리로부터』, 문학과 지성사(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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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현순영『응시와 열림의 시 읽기』(서정시학 비평선 38) 에서 / 2018. 1. 22. <서정시학> 펴냄

   * 현순영/ 제주 출생, 20013년 『서정시학』으로 펑론 부문 등단, 저서 『구인회의 안과 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