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파랑새 증후군/ 김명서

검지 정숙자 2011. 5. 5. 18:03

   파랑새 증후군


    김명서



   메르카토르도법


  자본의 이데올로기에 밀려 방랑을 일삼는 좌, 큰 그릇에 세상을 담아

아! 하고

  산밭에 호미로 불립문자를 새기는 우, 뛰지 말고 보폭만큼만 걸어라!

하고

  집요하게,

  나의 지구본 양극에 23개씩 유전체의 못을 박는다


  한 손에는 바람을 다른 손에는 흙을 쥐고 무게 중심을 잡아야 했다


  양팔저울에 올려놓은 핏줄의 필연성,

  좌와 우쪽으로 흔들리다가 수평을 잡는다

  슬쩍 좌의 말을 복사해 두고 나는

  지구본에서 꿈의 행성을 다치지 않게 오려낸다

  300분의 1로 축척된 거리를 실제의 값으로

  환산한 후

  한번쯤 비상하고 싶은 날개를 족보의 책갈피에 끼워둔다


  혈통의 60퍼센트가 허세와 체면에 덮여 있는

  엄숙한 가계도

  더 빨리

  더 속되게

  늙어버린 혈족들


  #꿈의 행성


  북위 37.6˚ 동경 127˚ 만화경 세상

  소비자는 미덕의 왕이라고

  연일 신용카드를 뿌려대며 축제를 벌인다


  나의 이목구비는 왕이 되기엔 불편했으므로

  먼저 사냥법을 익히고 닥치는 대로 사냥을 했다

  지독한 공복감이 찾아왔다


  나는 백화점 쇼윈도에서 밍크와 악어를 사냥해왔다


  #바벨의 유혹


  구로공단의 순정한 노동을 압구정 로데오거리로 옮기고부터 다시 찾은

  정신과,

  의사가 책 한 몇 권 처방해 주었다


  도서관에 들러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과 밀턴 프리드먼을 빌려와 맛

도 모르고

  책장을 한 장씩 뜯어먹었다


  거대한 자본이 앞 다투어 노동의 땀과 피를 짜낸다는,

  역사 지도는 노동자의 이름을 기록하지 않는다는 것은

  오래전 진실


  가방에서 넘쳐나는 신용카드를 휴지통에 던져버렸다

  이미 단맛에 길들여진 나,

  도마뱀꼬리같이 자라나는 욕망을 움켜쥐고

  신용불량이란 화려한 라벨 하나 더 달게 되었다


  #관성의 배꼽


  목 끝까지 독한 술에 절인 날이면

  유적 속 미완의 흉상들이 지나간다

  일곱 살 내가,

  가계도 위를 퉁퉁대며 헤살거린다


  새된 기침소리

  사랑채 정지문을 열어젖히고

  다 해진 이데올로기를 실에 매달아 날려 보낸다

  성급하게 떨어진다


  억새꽃 머리에 인 불립문자

  부엌에서 엉거주춤 걸어 나와

  밍크며 악어를 끌고 가 마당귀에 불을 지른다

  “너무 늦지 않게 돌아오너라…….”

  표정 없는 잔소리 떨어진다



  *『현대시』2011-5월호 <현대시작품상 이달의 추천작>에서

  * 김명서/ 전남 담양 출생, 2002년『시를 사랑하는 사람들』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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