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에임즈 룸/ 정채원

검지 정숙자 2011. 5. 6. 13:21


  에임즈 룸*


   정채원

 



이 가을엔 P가 사기꾼 같다

머리통 위에 수박 하나 얹은 만큼 키도 커버렸다

지난 여름 건달이었던 y는

주머니 속 초콜릿을 계속 만지작거리기만 한다


P는 오른쪽 구석으로

y는 왼쪽 구석으로

둘이 자리를 바꾼다

Y의 몸통이 풍선처럼 부풀어오르고

p는 어느 틈에 난장이가 되어 있다


2년 전 가을부터 사랑을 호소하는

p의 얼굴을 조각그림으로 맞추어본다

검정색 조각으로는 담배 피우는 남자

흰색으로 보면 술에 취한 여자 얼굴

왼쪽 뺨에선 물고기가 헤엄을 치고

오른쪽 귀에선 새가 날아오른다

소녀의 이마가 할머니의 턱이 되고

할머니의 목주름이 소녀의 스커트가 되기도 한다

Y의 심장 속 말라깽이 공주는

어느 틈에 뚱보 마녀가 되어 있다

천사를 먼저 보든 악마를 먼저 보든

구겨질 것도 펴질 것도 없다

발가락은 구두 속에 다소곳이 숨어 있지만

엄지가 검지보다 늘 키가 큰 건 아니다

다정했던 오른손이

오늘은 왼손보다 더 무뚝뚝하다


찢어버린 원근법 틈새로

우울한 표정의 회색 물방울이 똑똑 떨어진다

P와 y가 다시 자리를 바꾸려다 미끄러진다




*에임즈 룸(Ames Room):  미국의 알버트 에임즈 주니어가 1943년에 고안. 배경에 의해

사물의 크기가 달라 보이는 광학적 착시현상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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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대시』2011-5월호 <신작특집>에서

 * 정채원/ 서울 출생, 1996년『문학사상』으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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