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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시인 굴원과 '중취독성(衆醉獨醒)'의 시학/ 김경엽(金京燁)

검지 정숙자 2017. 9. 5. 01:19

 

<중국문학 산책>

 

 

    최초의 시인 굴원과 '중취독성衆醉獨醒'의 시학

 

   김경엽(金京燁)

 

 

  1. 단오절 혹은 시인의 날

  지금부터 2,300여 년 전, 중국의 호남성 장사에서 멀지 않은 멱라覓羅 강가. 더위가 막 시작되던 어느 초여름 날이었다. 한 노인이 홀로 강변을 배회하고 있었다. 여름 풀벌레 소리가 적막했다. 노인의 얼굴에는 수심이 가득했고, 깡마른 몸매는 마른 나뭇가지 같았다. 불어오는 강바람에 산발한 머리가 제멋대로 흩날렸다. 몹시 초라한 행색이었다. 하지만 움푹 꺼진 눈에서 흘러나오는 형형한 눈빛만은 감출 수가 없었다.

  강변을 서성이던 노인이 커다란 돌덩이를 가슴에 끌어안고 강물로 뛰어든 것은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때 마침 부근에서 고기잡이하던 어부들이 소리치며 달려왔다. 노인을 구하기 위해 있는 힘을 다해 노를 저어 왔지만, 이미 그의 흔적을 찾을 길이 없었다. 밤이 깊도록 노인을 찾으려는 어부들이 속속 몰려들어 강변에는 수많은 사람들로 붐볐다. 한편 누가 시작했는지도 모르게 어부들은 각자 집에서 밥을 가지고 와 강물에 던지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물고기야, 물고기야, 이 밥 먹고 충신을 물어뜯지 마라. 몸 상하게 하지 마라"라고 간절히 기도하는 소리가 어두운 강물 위로 흩어졌다. 끝내 노인은 찾지 못했고, 흐느끼는 사람들의 울음소리만 밤하늘에 메아리쳤다. 때는 기원전 278년 음력 5월 5일이었고, 투신한 노인은 굴원이라 불리는 인물이었다.

  물론 위의 이야기는 전설에 가깝다. 음력 5월 5일, 그러니까 단오절의 기원 중 하나로 중국인들에게 널리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다. 사실이야 어쨌든 중국인들은 굴원의 안타까운 죽음을 기념하기 위해 시작된 명절이 단오절이라고 오래전부터 믿어 왔다.

 이후 매년 단오절이 되면 중국 각지에서는 성대한 축제가 펼쳐진다. 그 중에 '쫑즈粽子 만들기'와 '용주龍舟대회'가 대표적인 행사다. 쫑즈란 댓잎이나 연잎에 찹쌀을 싼 다음 쪄서 만든 중국의 전통 음식이다. 매년 단오절이면 쫑즈를 멱라수에 던지며 다시 한 번 물고기들에게 굴원의 몸을 상하게 하지 말라고 기원하는 것이다. 용주대회 또한 굴원이 투신한 그 옛날, 그를 구하기 위해 급히 노를 저었던 어부들의 안타까운 심정을 되새겨보기 위한 경주의 일종이다. 오늘날에도 매년 단오절이면 중국은 물론 동남아 중화권 국가에서도 성대히 치러지는 행사가 되었다.

  중국인들이 수천 년 전 투신한 한 사내를 그토록 오랜 세월 기억하고 추념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는 중국문학사에서 최초의 시인으로 호출되기도 하지만, 그의 생애가 보여준 충군애국의 정신은 중국인들이 국난의 위기에 처할 때마다 그를 그리워하고 호명하는 중요한 이유가 되었다. 시인에게 애국이나 충군 따위의 봉건 정치이데올로기의 잣대를 들이댄다는 세간의 비판을 감수하면서까지 중국인들과 그들의 문화 속에서 굴원은 여전히 살아 있는 정치가이자 시인이다. 세계 어느 나라에 '시인의 날'이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단오절을 '시인절詩人節' 이라고도 부르는 중국 문화의 힘은 굴원 같은 인물에 크게 빚지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2. 두 번의 추방, 시인의 탄생

  굴원屈原(기원전 343?~기원전 278?)은 중국 역사상 대변혁기인 춘추전국시대 후기를 살았던 인물이다. 당시 남방의 대국이었던 초나라 태생으로, 그는 초를 건국했던 왕족 출신의 귀족이었다. 명문가의 후예답게 그는 타고난 인품과 천부적인 재능으로 평생토록 긍지와 자부심을 잃지 않는 삶을 살았다. 왕족 출신으로서 또 타고난 능력으로 당시 회왕懷王(기원전 328~기원전 299) 에게 신임을 얻고 국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사마천은 《굴원열전》정치가 굴원의 활달했던 모습을 우리에게 생생하게 전달해주고 있다.

 

  "굴원은 이름이 평, 초나라 왕족과 동성이다. 초나라 회왕의 좌도가 되었으며, 견문이 넓고 기억력이 비상했다. 치란治亂의 도리에 밝고 문장에도 능했다. 조정에 들어와서는 왕과 국가 대사를 논의하고, 대외적으로 외국의 사절을 접대하고 제후를 응대하여 왕의 신임이 아주 두터웠다."

 

  좌도란 내치와 외교를 동시에 수행하는 매우 중요한 관직이었다. 젊고 영민한 굴원에 대한 회왕의 신임은 한때 절대적이었다. 당시의 국제정세는 전국칠웅戰國七雄이 서로 패권을 다투던 약육강식의 시대였다. 6국이 남북으로 합종하여 서쪽의 진나라에 맞서야 한다는 합종合從의 전략과 진나라가 나머지 6국과 각기 연대하여 6국의 전력을 약화시켜야 한다는 연횡連橫의 지략이 중요 화두로 등장했던 시기였다. 천하통일의 대업을 완성하기 위하여 각 나라마다 안으로는 혁신과 개혁을 통해 부국강병을 꾀하고, 밖으로는 자국의 이익을 도모하기 위해 현란하고 치열한 외교술이 날마다 불꽃을 튀겼다.

  이런 엄혹한 국제정치 속에서 초나라 회왕은 한 나라의 안위를 책임질 군주로서의 자질이 좀 부족했던 것 같다. 간신배들의 거짓 충언이나 이간질에 자주 현혹되었고 쉽게 속아 넘어갔다. 굴원이 좌도로서 작성한 법령은 초나라의 개혁과 혁신을 위한 진보적인 정책의 토대가 되었고, 그가 앞장섰던 외교 행위 또한 열국이 패권을 다투던 시기, 초나라의 안녕과 이익을 지키는 초석이 되었던 것을 물론이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개혁과 혁신에는 수구세력의 반동과 저항이 있게 마련이었다. 내정을 위한 굴원의 개혁 정책에 반기를 들고 나선 것은 구 귀족인 보수 세력이었다. 그들은 나라의 안위보다는 개인의 이익을 앞세워 기득권을 지키기에 여념이 없었다. 당시 상관대부官大夫였던 근상靳尙과 왕자 자란子蘭 등이 대표적 수구세력이었다. 마침내 그들은 회왕의 신임을 독차지하고 있던 굴원을 시기하고 참소하기에 이른다. 사마천은 《굴원열전》에서 간결한 필치로 그 과정을 우리에게 들려주고 있다.

 

  "당시 상관대부와 굴원은 지위가 같았는데, 왕의 총애를 다투다보니 굴원의 재능을 은근히 시기했다. 한번은 회왕이 굴원에게 국가의 법령 제정을 명령했다. 굴원이 아직 초안만 작성한 상태였는데, 상관대부가 이것을 보더니 빼앗으려 했다. 굴원이 이를 거부하자 왕에게 첨언했다. '왕께서 굴원에게 법령을 만들라고 시킨 일은 모르는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법령이 한 가지 나올 때마다 굴원은 자신의 공이라고 자랑하고 다닙니다. 자기가 아니면 아무도 그 법령을 만들 수 없다고  거들먹거립니다.' 왕은 말을 듣자마자 크게 분노하고는 굴원을 멀리했다."

 

  '굴원을 멀리했다'는 말은 원문 '소굴원疏屈原'의 해석이다. 이 말을 좀 더 적극적으로 풀이한다면, 조정에서 쫓겨나 유배의 길에 오른 것이 아닌가 짐작된다. 굴원의 첫 번째 정치적 좌절이자 시련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던 셈이다. 정치적 공백기 동안 유배지에서 그는 혼자 쓸쓸했고, 억울했을 것이다. 자긍심에 상처를 입었고, 간신배들이 들끓은 조정과 어둡고 아둔한 군주를 향한 애증이 교차했다. 추방된 정치가 굴원이 유배지에서 그의 억울함과 상처와 고독과 애증의 심정을 한 자 한 자 글로 써내려갈 때 그는 자신도 모르게 시인이 되어 갔다. 사마천은 이때 굴원의 심정을 이렇게 묘사했다.

 

  "비록 쫓겨나 있었지만 여전히 초에 대한 그리움과 회왕에 대한 걱정으로 언제나 조정으로 다시 돌아가기를 바랐다. (……) 그의 충군 애국의 열정은 허물어져 가는 초를 구할 수 있기를 간절히 열망하여 한 편의 작품 속에 그 뜻을 쓰고 또 섰다."

 

  어리석은 군주 회왕은 진나라의 외교와 속임수에도 번번이 놀아났다. 끝내 진나라에 붙잡혀 그곳에서 생을 마쳤으니, '혼이여 돌아오라!' 부르짖은 굴원의 애가 <초혼招魂>을 지하에서나마 들으며 굴원에게 용서를 빌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굴원의 두 번째 추방 역시 회왕을 이어 왕위에 오른 경양왕頃襄王(기원전 298~기원전 263)이 저지른 우둔한 실책이었다. 구 귀족 세력에 의한 정치적 부패와 탐욕, 이로 인한 정치사회적 혼란과 무능한 군주의 전횡은 초나라의 국운이 멸망으로 가는 서막이 되었다. 하지만 굴원 이외에 국가적 위기를 예민하게 감각한 인물은 아무도 없었다. 마침내 굴원은 경양왕 21년인 기원전 278년 초나라의 수도영도郢都진나라에게 함락되었다는 비보를 강남의 유배지에서 듣게 된다.

  이제 굴원에게는 돌아갈 조국도, 충성의 직간을 올릴 군주도, 함께 아름다운 정치를 논할 동지도 없게 되었다. 육체와 영혼은 지치고, 모든 희망은 사라졌다. 그는 초췌한 행색으로 멱라수 근처를 천천히 배회했다. 그리고는 돌덩이를 끌어안고 강물로 투신했다. 그의 나이 62세 무렵이었다. 난세를 살았던 실패한 정치가가 죽어서 시인으로 부활하는 순간이었다.

  그는 암흑의 시대 속에서 올바른 정치의 길을 모색했고 한편으로는 좌절된 이상과 모순된 현실에 분노하여 자신의 고통스런 감정을 글쓰기로 드러내고자 했다. 그래서 그가 남긴 문장은 정치 논술이 아니라 인간의 희노애락이 굽이치고 흔들리는 영혼의 궤적을 따라갔던 시이자 문학이 되었다. 살아서는 정치가였던 그 죽어서는 시인으로 부활한 까닭이다. 그는 살아서 한 번도 시인으로 불린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의 투신은 실패한 정치가가 시인으로 부활하기 위한 비장한 제의가 되었다. 

 

 

  3. 환상과 비애

  문학의 근원은 '불평不平'에서 출발한다. 불평이란 마음의 평정이 깨진 상태다. 시인과 문인은 불평하는 자들이다. 불평은 어디에서 유래할까? 자신의 욕망, 원칙, 포부, 재능이 세상과 불화할 때, 불평은 알 수 없는 심연에서 원한처럼 서식하기 시작한다. 불평은 은밀한 내면의 목소리를 통해 공명한다. 공명이 간절할수록 시인을 시인답게 문인을 문인답게 한다. 그들은 '글쓰기'라는 공명통을 수단으로 불평을 발설한다. 중국에서 불평의 최초의 발설자는 바로 굴원이었다. 굴원이 불평을 발설하는 수단으로써의 글쓰기의 동력은 <석송惜誦>이란 시편의 한 구절에 명료하게 표현되어 있다.

 

  애통한 하소연으로 근심을 드러내고  惜誦以致愍兮 

  분노를 발설하여 진정한 마음을 토로한다  發憤以抒情 

 

  굴원의 대표작인 <이소離騷>는 바로 불평의 기록이다. 그의 타고난 성품은 강직하고 고결했으며, 이상은 드높았다. 그러나 그가 맞닥뜨려야 했던 당대의 정치 현실은 그의 모든 포부와 희망을 배반했다. 마치 둥근 구멍에 네모난 막대를 끼워야 하는 절대 모순의 상황이었다. 굴원과 세계와의 관계는 화해 불가능한 상태였다.

  굴원은 먼저 <이소>에서 자부심 가득한 자랑스러운 어조로 가문의 내력과 자신의 출생에 관해 피력한다. 젊은 나이에 초왕에 발탁되어 정치 개혁을 추진했던 이력은 그에게 너무도 짧았던 행복한 순간이었을 것이다. 곧이어 찾아온 수구 세력의 완강한 저항과 박해 그리고 억울한 누명을 쓰고 임금에게 추방당하는 과정을 굴원은 격렬한 필치로 묘사하고 있다. 그의 글쓰기의 어조와 정조는 마치 도도하게 흐르는 장강의 물결처럼 때로는 포효하고 때로는 굽이친다.

  모두 373구 2,490자에 달하는 중국 최초이자 최대의 장편시 <이소>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상상과 환상성이다. 상상과 환상을 통해 굴원은 암울한 현실과 깊은 절망을 초월하고자 했다. 신화와 전설 그리고 무풍巫風이 맥동하는 천상으로의 여행은 <이소>의 낭만과 신비의 절정이다.

 

  네 마리 용을 몰아 봉황 수레를 타고  駟玉叫以乘鷖兮

  바람 불어 오길 기다려 하늘로 오르네  溘埃風余上征

  아침에 순임금 묻힌 창오를 출발하여  朝發軔於蒼梧兮

  저녁에 곤륜산 현포에 닿았네  夕余至乎縣圃

  ……

  이 신비한 문전에서 잠시 머물려고 했더니  慾少留此靈鎖兮

  해가 벌써 지려고 하는구나  日忽忽其將暮

  태양신 희화에게 명해 해수레를 멈추게 하고  吾令羲和弭節兮

  해 지는 엄자산을 바라보며 가까이 가지 못하게 하네  望崦嵫而勿迫

  길은 아득히 멀고 험난해도  路曼曼其脩遠兮

  나는 오르고 내리며 찾아 헤매리  吾將上下而求索

  내 말을 함지에서 물 먹이고  飮余馬於咸池兮

  말고삐를 부상 나무에 매어두네  總余轡乎扶桑

  약목을 꺾어 서산에 지는 해를 털어버리고  折若木以拂日兮

  잠시 여기서 소요하며 노니네 聊逍遙以相羊

  달의 신 망서를 앞세우고  前望舒使先驅兮

  바람의 신 비렴을 뒤따르게 하네  後飛廉使奔屬

  난새와 봉황이 날 위해 호위하는데  鸞凰爲余先戒兮

  천둥 신 뇌사는 내게 준비가 덜 됐다고 하네  雷師告余以未具

  난 봉황새 더러 높이 날아올라  吾令鳳鳥飛騰兮

  밤낮으로 멈추지 말고 날아가게 하네  繼之以日夜

  휘날리는 돌개바람도 한데 모여서  飄風屯其相離兮

  오색구름 이끌고 나를 영접해 하늘로 오르네  帥雲霓而來御

 

  시인은 용이 끄는 봉황 수레를 타고서 곤륜산에 오른다. 태양의 신 '희화', 달의 신 '망서', 바람의 신 '비렴', 천둥의 신 '뇌사', 해가 목욕한다는 '함지', 태양이 뜨고 지는 곳에서 각각 자란다는 신목 신목 인 '부상'과 '약목' 등이 신화적 의장을 걸친 채 출현한다. 초월을 향해 여행 중인 시인의 앞뒤에서 출몰하고 좌우에서 호위한다. 장려한 천상여행은 지상에서 상처받은 자신의 영혼을 치유하고 위로 받으려는 필사적이 여정이었다.

  <이소>가 거느리고 있는 낭만과 환상 그리고 신화적 아우라는 초나라의 기층문화와 관계가 깊다. 북방의 중원문화와 달리 남방의 초문화는 고대국가인 하상夏商 문화를 계승했다. 하상문화의 핵심은 신령과 제사의식 그리고 모속의 성행이다. 주대周代의 문화를 모범으로 삼은 중원문화가 이성과 철학이란 햇빛의 세례 아래 철학자와 사상가, 산문가를 배출했다면, 하상문화에서 수혈 받은 초문화의 풍부한 감성과 낭만은 시인을 탄생케 했다. 굴원은 바로 초문화가 보유하고 있는 신화, 전설 그리고 무풍이 협력하여 주조해 낸 최초의 시인이었던 셈이다.

  우리가 <이소>를 읽을 때 느끼는 감정의 회오리는 환상과 함께 찾아오는 모종의 비애감이다. 비애는 단호하게 결기 서린 문체와 결합할 때, 비장미悲壯美로 승화한다. 환상이 하늘과 신화의 영역이었다면, 비장은 철저히 지상과 현실의 일이다. 비장은 굴원의 죽음과 직접 관련된다. 그러기에 우리는 자주 <이소>를 비가悲歌로 읽는다.

 

  아침에 모함 받고 저녁에 버림 받았네  謇朝誶而夕替

  아홉 번 거듭 죽을지언정 후회하지 않네  雖九死其猶未悔

  ……

  차라리 빠져 죽어 물 따라 흘러갈지라도  寧溘死以流亡兮

  세속의 이런 추태 차마 견디기 어렵구나  余不忍爲此態也

  ……

  맑고 깨끗함을 죽음으로 지키는 것은  伏淸白以死直

  본래 성인들이 중히 여기던 바였네  固前聖之所厚

 

  부분 인용한 시에서 시인은 거듭 죽음을 입에 담는다. 낭만과 환상이 사라진 자리에 짙은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것이다. 세속의 모함은 시인을 쓸쓸한 물가로 추방했지만, 추방의 고독 속에서도 시인은 세속의 무리와 타협할 줄 몰랐다. 타협 대신 그가 선택한 길은 비장한 죽음이었다.

  굴원의 다른 시 <회사懷沙>는 제목을 대면하는 순간부터 우리를 진저리치게 한다. <회사>는 '돌덩이를 가슴에 품다'라는 뜻이다. 돌덩이를 가슴에 안고 강물로 풍덩 뛰어드는 굴원의 됫모습이 보이는 듯하다. <회사>는 굴원의 절망과 비장한 결단을 고백하는 절명시絶命詩의 본보기다.

 

  세상이 혼탁해 나를 알아주는 이 없으니  世溷濁莫吾知

  사람 마음 하소연할 길 없구나  人心不可謂兮

  좋은 바탕과 뜻을 품고 있어도  懷情抱質

  홀로 고독하게 짝할 사람이 없네  獨無匹兮

  백락이 이미 죽고 없으니  伯樂旣歿

  누가 천리마를 알아볼까  驥將焉程兮

  만민이 태어날 때는  萬民稟命

  저마다 생사의 자리가 정해져 있네  各有所錯兮

  마음을 정하고 뜻을 넓혔으니  定心廣志

  내 무엇을 두려워하리  余何畏懼兮

  죽음을 피할 수 없음을 아니  知死不可讓

  미련 두고 싶지 않아라  願勿愛兮

  세상 군자들에게 분명히 말하노니  明以告君子

  내 장차 죽음으로 그대들의 본보기 되리  吾將以爲類兮

 

  천하의 명마인 천리마를 알아본다는 '백락'이 부재하는 세상, 자신이 '천리마'라 한들 이제는 아무런 쓸모가 없다. 고독한 유배지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자마다 운명처럼 타고난 생사의 자리를 똑바로 바라보는 일이다. 혼타가한 세상사에는 더 이상 아무런 미련이 없다. 시인에게 마지막 남은 건, 죽음이라는 불가피한 선택지일 뿐이다. <이소>의 마지막 구절 또한 돌덩이를 끌어안고 투신하기 직전, 시인이 지상에 새긴 최후의 시구처럼 들린다.

 

  마무리: 이제 그만하리라  亂曰: 已矣哉

  나라 안에 나를 알아주는 이 없으니  國無人莫我知兮

  고국에 무슨 미련을 두리  又何懷乎故都

  더불어 아름다운 정치 논할 이 없으니  旣莫足與爲美政兮

  나 이제 팽함이 있는 곳으로 가리라  吾將從彭咸之所居

 

  '미정美政', 즉 '아름다운 정치'는 굴원이 평생 추구했던 그의 정치적 가치이자 신념이었다. 왕족 출신인 그가 선대의 유업을 받들어 초나라의 부국강병을 꾀하고 나아가 초나라가 천하통일의 대업을 완성하게 하는 것이었다. '팽함'은 임금에게 직언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강물에 투신한 고대 은나라의 현신賢臣이다. 그의 뒤를 따라 가겠다는 굴원의 결기가 칼날처럼 차갑고 날카롭게 빛나는 마지막 구절이다.

  가치와 신념의 좌절로 인해 역사는 그를 실패한 정치인으로 잠시 기억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좌절에 대한 길고도 혹독했던 내심內心의 기록은 그를 영원한 시인으로 부활하게 하였다. 굴원의 작품들은 모두 좌절로 인한 불평과 불평에 대한 내심의 격렬하고도 비극적인 시편들이다. 

 

 

  4. 중취독성의 시학

  추방당한 강남의 어느 물가에서 굴원과 어부가 나누었다는 대화  한 대목이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우리는 이 에피소드를 통해 초췌하고 깡마른 2,300여 년 전의 시인의 체온과 인품을 느낄 수 있을 것만 같다.

  굴원이 물가를 산책하고 있을 때 마침 지나가던 어부가 물었다. "당신은 삼려대부가 아니십니까? 어찌하여 여기까지 오셨습니까?" 굴원이 대답했다. "세상이 모두 혼탁한데 나 홀로 맑고, 모든 사람이 취했는데, 나 혼자만 깨어 있소. 그런 까닭에 추방되었다오." 어부가 다시 말했다. "성인이란 외물에 구애받지 않고, 세상의 변화에 맞춰 처신한다고 합니다. 세상이 혼탁하다면, 어째서 진흙을 휘저어 함께 흙탕물을 일으키지 않습니까? 모든 사람이 취했다면, 어째서 함께 어울려 취하지 않으십니까? 어째서 혼자 깊이 생각하고 고결하게 행동하여 추방을 자초하십니까?" 굴원이 노인의 말을 듣고 한참 생각하더니 다시 또박또박 말했다. "머리를 감은 자는 반드시 관을 털어서 쓰고, 목욕한 자는 반드시 옷을 털어서 입는다고 하오. 사람이라면 누가 깨끗한 몸에다 더러운 먼지와 때를 묻히려 하겠소. 내 차라리 장강에 몸을 던져 고기 뱃속에 장자지낼지언정 어찌 결백한 몸으로 세속의 먼지를 뒤집어쓰겠소." 했다. 어부가 듣고는 빙그레 웃더니 노를 저어가며 노래를 불렀다. "창랑의 물이 맑으면 나의 갓끈을 씻고, 창랑의 물이 흐리면, 내 발을 닦으리다" 하고는 다시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어부는 물론 가상의 인물일 것이다. 굴원은 자신의 세계관과 대립하는 어부를 등장시켜 스스로 추구했던 신념과 이상을 계시하고자 했다. 추방된 원인이기도 한 그가 추구했던 핵심 가치는 '세상이 모두 혼탁한데 홀로 맑고, 모든 사람이 취했는데 혼자 깨어' 있고자 한 삶의 태도이다. 이것은 정치가인 굴원의 삶의 지표인 동시에 시인으로서의 굴원의 '중취독성醉獨醒의 시학'이라고 하기에 충분하다. 모두 취해 있을 때, 홀로 깨어있을 용기에는 시인의 비타협적 저항정신이 배면에 자리하고 있다. 굴원의 비극이 탄생한 지점이기도 하다. 

  "머리 감은 자는 반드시 관을 털어 쓰고新沐者必彈冠, 목욕한 자는 반드시 옷을 털어 입는다新浴者必振衣"는 굴원의 항변에서 우리는 한 시인의 완벽주의적 결벽증을 마주 대한다. 한 터럭의 티끌도 용납할 수 없었던 그에게 당대의 혼탁한 정치와 세속의 박해는 견디기 어려운 치욕의 순간들이었을 것이다. 치욕과 고뇌의 순간마다 그는 자신의 내면을 응시했고, 자각된 개인의 행로와 운명을 또박또박 써 내려갔다. 한 번도 시도된 적 없었던 형태의 시, 신체시는 이렇게 굴원에 의해 시도되고 창작되었다.

  굴원이 남긴 작품군을 묶어서 우리는 《초사楚辭》라고 부른다. 초나라의 말로 된 초나라의 노래란 뜻이다. 초사 훨씬 이전에 우리는 중국시의 효시인 《시경詩經》을 알고 있다. 《시경》이 중국민족 공동체의 집단 노래, 집체 인격이라면, 《초사》는 중화민족이 부른 최초의 개성적인 개인의 노래다. 《시경》이 익명성의 합창이라면, 《초사》는 굴원이라는 기명인의 독창이다. 《시경》이 황하 유역의 치란治亂과 이별과 세상의 물락을 위로했다면, 《초사》는 오직 한 사람의 고행과 우수와 시름을 노래했다. 그리고는 신화와 낭만의 천상으로 솟아올라 비루한 현실을 초월하고자 했다. 《시경》이 우리에게 시란 무엇인가를 처음으로 알려주었다면, 굴원의 삶과 그의 글쓰기는 시인이란 누구인가를 최초로 질문하게 하였다. 우리가 굴원의 시를 읽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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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학사상』2017-9월호 <연재|중국문학 산책 17회>에서

  * 김경엽金京燁/ 강원 원주 출생, 2007년 『서정시학』으로 등단, 고려대 대학원 비교문학비교문화협동과정 박사과정 수료, 총신대 교양학과 출강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