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파트의 글

이승하_시가 있는『편지』/ 잠 못 이루는 그대에게

검지 정숙자 2017. 8. 29. 02:12

 

 

    잠 못 이루는 그대에게

 

    이승하

 

 

  그대 지금 불면증으로 고통받고 있습니까? 아니면 그냥 오늘밤 잠을 못 이루고 있습니까? 잠이 영 안 오신다면 제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주십시오.

  저는 여러분과 마찬가지로 제 수명을 모릅니다. 제가 쓴 것 가운데 사후에도 읽혀질 시가 과연 있을지도 알 수 없습니다. 저는 1984년 이래 지금까지 시인이었고, 앞으로도 시를 쓰면서 살아갈 것입니다. 욕심이야 다른 시인들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자신의 시가 시간을 초월하여 후대인도 읽어주기를, 공간을 초월하여 먼 도시의 사람들도, 나라 바깥의 사람들도 읽어주기를, 이 욕심은 사실 얼마나 부질없는 것일까요. 나는 이미 이 세상에 없는데 내 시를 두고 누가 뭐라 하든 그것이 무슨 소용입니까. 하지만 시는 예술이기에 그 자체가 시공을 초월할 힘을 갖습니다.

 

  제게는 신라의 승려 혜초(704~787)가 당나라로 간 구법승이나 인도 전역과 서역을 여행한 여행가라기보다는 시를 쓴 시인으로서의 의미가 더욱 큽니다.

  1200년 동안 동굴 속에 파묻혀 있다 발견된 두루마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이름은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 혜초가 쓴 인도 여행기였습니다. 6000자가 빼곡히 적혀 있는 그 두루마리 안에는 다섯 수의 시도 들어있었고, 저는 그 시에 대해 글을 쓴 적이 있습니다(『현대시학』2000년 4월호 참조), 결론은 다음과 같이 맺었습니다.

 

  시를 통해 나는 그의 체취를 맡을 수 있으며 숨소리를 들을 수 있다. 슬플 때 눈물 흘리고 기쁠 때 웃을 줄 알았던 신라인, 속세를 떠난 승려였지만 그는 그 이전에 감정이 풍부한 시인이었다.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영원의 별빛을 뿌릴 수 있는 시라는 이 오묘한 것!

 

  혜초가 걸어갔던 길의 극히 일부를 따라가 보았습니다. 제가 중국 시안西安으로 가는 직항기에 몸을 실은 것은 2000년 7월 18일이었습니다. 서울→시안→우루무치→투루판→유원→둔황으로 이어진 7박 8일의 여전은 그 옛날 중국과 서역 각국간의 비단무역을 계기로 만들어진 실크로드 중 텐산북로를 택해 우루무치에서 둔황으로 거슬러 내려오는 행로였습니다.

  저는 그때 지구의 저편, 중국의 서북쪽으로 날아가 '엄청난 시간'을 만났습니다. 진정한 예술만이 시간을 추월할 수 있다는 확신을 한 것도 그 여행에서였습니다.

 

 

  길 물으니 다음 마을까지는

  또다시 1백 리 황무지 길이라 한다

  돌아보니 길은 모래바람에 사라지고

  걷다보니 길은 끊겼다가 다시 나타난다

 

  사람 사는 마을 그 어디를 가도

  늘 들을 수 있는 웃음소리와 울음소리

  골목길에서 노파는 손자 업고 흐뭇해하고

  동구 밖에다 어미는 자식 묻으며 슬피 운다

 

  하지만, 나의 길은 마을로 나 있지 않다

  영원의 법을 찾아 부르튼 발 앞으로 옮기면

  서역의 하늘 끝은 늘 입다문 지평선

  가도 가도 인가의 불빛 한 점 보이지 않지만

 

  어서 가자 밤을 도와 저 투루판 분지까지

  넘어온 텐산산맥보다 더 아스라한 길을

  오늘도 부지런히 걸어가야 하는 것은

  내가 나서야 길이 비로소 길이기 때문

    -「혜초의 길」전문

 

 

  제 자신 혜초가 된 양, 혜초의 입을 빌려 시를 써보았습니다. 당나라에 유학 가 있던 통일신라시대의 승려 혜초가 불교의 발상지 인도 순례에 오른 것은 723년이었습니다. 배를 타고 동남아시아를 거쳐 725년 인도에 도착한 혜초는 동부 인도에서 서북 인도를 돌아 중앙아시아 드넓은 땅을 편력했으며, 실크로드를 통해 729년에 당나라로 돌아왔습니다.

  혜초가 걸어간 길은 그야말로 고행의 연속이었을 것입니다. 겨울의 눈보라와 한여름의 모래폭풍을 헤치며 수만 리를 걸어서 여행하는 동안 그는 보고 듣고 느낀 것을 기록했습니다. 그의 글은 8세기경의 인도와 중앙아시아에 대해 쓴 세계 유일의 기록문이라고 합니다. 정성이 지극하면 값진 글을 쓸 수 있고, 그 글은 후세에 남을 것입니다. 그런 믿음을 갖고 오늘도 저는 시를 씁니다. 시 쓰기는 시공을 넘어서기 위한 지난한 몸부림입니다.

  제가 「황조가」와 「공무도하가」같은 고대가요와 「안민가」「제망매가」「풍요」「혜성가」같은 향가를 응용하여 시를 써본 것도 하루살이와 진배없는 생을 살면서 영원을 구가하고 싶은 욕망 때문입니다. 부질없다면 부질없는 대로 이렇게 타임머신을 타보는 것입니다. 

 

  저는 그 여행길에서 두 가지 놀라운 것을 보았습니다. 진시황릉에서 발견된 도용陶俑은 뛰어난 예술품이었습니다. 진시황은 자신의 무덤에다 6천 점이 넘는 도용을 왜 만들어 묻었던 것일까요. 1974년 우물을 파던 농부에 의해 발견된 도용은 흙으로 정교하게 빚은 병사와 병마兵馬로서, 병사의 키는 178~187㎝나 되고 몸체나 얼굴 모습이 전부 달랐습니다. 즉 틀에다 부어 만든 조각상이 아니라 일일이 손으로 빚어 만든 예술작품이라는 것입니다. 흙으로 빚은 것이 땅속에 묻힌 채 2,250년 동안을 흙으로 돌아가지 않고 현대에 나타나 그 옛날의 영광과 굴욕을 얘기해주고 있었습니다. 황제의 영광을 위해 동원된 사람은 70만 명이었고, 공사에 36년이 넘게 걸렸다니 얼마나 많은 사람이 노역의 현장에서 죽어갔던 것일까요. 하지만 그들은 예술가였기에 2000년이 넘는 시간을 살아 숨쉴 수 있었던 것입니다.

  둔황의 천불동 석굴 사원의 발견도 극적이었습니다. 1908년, 프랑스의 동양학자 페리오에 의해 어마어마한 수의 석굴 사원들이 발견되었는데, 그중 하나에는 AD 5~11세기에 만들어진 2만 점 가량의 그림과 필사본들이 소장되어 있었습니다. 불교뿐 아니라 도교 · 조로아스터교 · 네스토리우스교의 경전들과 「왕오천축국전」등 중세 인도와 중국 사회의 역사를 알 수 있는 사료들도 다수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황량한 고비사막 저쪽에서 잠들어 있던 고대와 중세가 현대에 들어서서 비로소 눈을 뜬 것이었습니다. 혜초의 시간은 1200년이었는데 저의 시간은 12년이나 될까요. 12년도 긴 시간입니다. 부지런히 시의 길을 가고자 합니다. 시간은 바람처럼 왔다 물처럼 가는 것이 아니라 내가 땀 흘리며 그려내는 것이려니. 

 

 

  또다시 황사바람이 불어와 눈 비빈다

  이 모진 바람 언제부터 불어왔을까

  산맥을 넘고 사막을 지나온 시간

  바위가 돌이 되듯 세월 부서지고

  돌이 모래가 되듯 시간 쌓였으며

 

  둔황 막고굴 속에 봉인되어 있던

  혜초의 시간 장장 1200년

  그 동안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태어나고

  죽어가면서 참 많이도 울었으리 눈물 없는

  서방정토를 꿈꾸며 그렸을까 둔황 벽의 그림들

  시간은 바람처럼 왔다 물처럼 가는 것이 아니라

  내가 땀 흘리며 그려내는 것

  둔황 가는 길 다리 아파 밤하늘 우러르니

  캄캄한 저 하늘에 가물가물한 별빛 하나

  고개 끄덕이며 내 가슴에 불 밝힌다

    -「혜초의 시간」전문

 

 

     -----------------

   * 詩가 있는편지에서/ 초판1쇄 2007.10. 25./ 초판 3쇄 2017.7.20.<KM> 펴냄 

   * 이승하/ 1960년 경북 의성 출생, 1984년《중앙일보》신춘문예 시, 1989년《경향신문》신춘문예 소설 당선, 시집『사랑의 탐구』『감시와 처벌의 나날』등, 소설집『길 위에서의 죽음』, 시론집『한국의 현대시와 풍자의 미학』『향일성의 시조시학』등, 산문집『헌 책방에 얽힌 추억』『최초의 신부 김대건』등, 현재 중앙대 문예창작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