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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은경_『밖으로부터의 고백』디아스포라로 읽는 세계문학(발췌)

검지 정숙자 2017. 8. 21. 21:34

 

 

    밖으로부터의 고백

   -로랑 세크직의『슈테판 츠바이크의 마지막 나날』(이세진 역, 현대문학, 2011)

     -슈테판 츠바이크의『어제의 세계』(곽복록 역, 지식공작소, 2003)

 

    정은경

 

 

  슈테판 츠바이크라는 거장을 처음 접한 것은 「체스 이야기」라는 중편소설을 통해서이다. 오래전의 독서라 다 잊어버렸지만 체스 챔피언과 무명의 아마추어와의 체스 대결, 그리고 그 아마추어의 독특한 체스 이력은 기억에 남는다. 배 안에서 우연히 벌어진 체스 대결에서 챔피언을 당혹하게 한 무명의 체스 기사는 십대 이후 한 번도 체스를 둔 적이 없었는데, 그럼에도 그가 챔피언과 겨룰 수 있는 실력을 지닐 수 있었던 것은 순전한 이론적 학습에 의해서이다. 그 아마추어는 어떤 일에 연루되어 나치의 게슈타포에 의해 호텔 독방에 감금된 적이 있었는데, 그 호텔 방 안은 책도 라디오도, 타인도 없는 절대적인 '무'의 시공간이었던 것. 그는 우연히 체스 교습서(이를테면 '바둑 정석' 같은)를 발견하고 하염없이 그 책을 읽고 복기하기를 반복하다가 그 공간에서 놓여난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배 안에서 챔피언과 맞대결하게 된 것이다. 챔피언은 십대부터 무수한 실전을 통해 경험을 쌓아 온 실력자로 등장하는데, 순수한 이론으로만 학습해 온 이 아마추어와의 대결은 당시 나로서는 마치 인생의 거대한 비밀이라도 엿보듯 흥미진진했다. 이론인가, 실전인가, 혹은 경험주의인가 합리주의인가, 이상주의인가 현실주의인가? 조그만 사각형 안의 직선과 말들의 움직임을 가지고 가당치도 않은 저런, 과장된 의미를 부여했지만 어쨌거나 자못 진지했던 기억이다. 20년 넘게 체스의 말 한번 실제 잡아 보지 못했던 사람이 상상과 관념의 체스판의 기억으로 과연 현역 챔피언을 능가할 수 있겠는가? '로맨티시즘의 극치'라고 생각했지만 매혹적이었다.

  한참 뒤에 『천재와 광기』『발자크 평전』『에라스무스 평전』을 읽으면서도 나는 이 전기 작가가 「체스 이야기」의 작가와 동일 인물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그러나 생각해 보니, 평전들에 뚝뚝 묻어나는 주관적 편향과 감상은 분명「체스 이야기」의 작가의 것이었다. 개인적으로 슈테판 츠바이크의 평전들은 냉정한 전기 작가의 그것이 아니라 인물을 사랑하고 숭배한 자의 그것(긍부정적 의미에서)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또 한참 뒤에, 슈테판 츠바이크의 마지막 생애를 다룬 『슈테판 츠바이크의 마지막 나날』을 만났다. 로랑 세크직이라는 프랑스의 작가의 작품으로 슈테판 츠바이크가 그의 두 번째 부인인 로테와 브라질의 페트로폴리스에서 동반 자살하기까지의 마지막 6개월을 다루고 있는 책이다.

  슈테판 츠바이크오스트리아 작가이고 유대인이며 독일어로 문필활동을 했다. 1881년 빈에서 태어나 제1.2차 세계대전을 겪었지만, 그 와중에도 그는 화려한 문필 생활을 했으며 백만장자의 집안에 태어나 경제적으로 풍요했고, 『3인의 거장』(천재와 광기」의 일부) 이후 세계적인 작가로 알려지면서 더 큰 부유함 속에서 살았던 인물이다. 그는 유럽에서 제일가는 장서가였으며, 베토벤을 비롯해 괴테, 모차르트, 레오나르도 다빈치, 발자크, 나폴레옹에 이르는 무수한 유명 인사들의 필적을 4천 장이나 지니고 있었던 수집가이기도 하다. 또한 그는 일찍부터 '세계시민'을 자처하면서 전 세계를 편력하였고(유럽은 물온 인도와 아프리카, 북미, 남미 등등) 제1차 세계대전 당시에도 스위스에, 제2차 세계대전 발발 당시에는 영국에 체류하여 비교적 전쟁과 아우슈비츠의 참극에서도 비껴나 있었다. 히틀러 정권이 들어서고(1933) 1년 후 영국 런던으로 이주했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뉴욕으로 망명했던 것이다. 그런 그가 종전을 얼마 앞둔 1942년 2월 22일 머나먼 브라질의 낯선 땅 페트로폴리스에서 불과 몇 년 전에 결혼한 젊은 아내와 동반 자살을 한 것이다.

  슈테판 츠바이크는 참여 작가도 적극적인 반전 작가(물론 그의 『희곡』은 반전 메시지로 당시 작가들에게 환영받았지만)도 아니었으며, 오히려 전장에서 도피한 작가이며 부와 명예를 통해 망명지에서도 비참한 생활을 면할 수 있었다. 그런데 영국과 미국을 거쳐 브라질에까지 가서 동반 자살이라니? 그의 간단한 이력으로는 이 의문을 풀기 쉽지 않다. 이 의문은 로랑 세크직에게도 마찬가지였던 듯하다. 슈테판 츠바이크의 자서전 『어제의 세계(DieWelt von Gestern)』는 빈 시절부터 1939년 제2차 세계대전 발발까지를 다루고 있는데 로랑 세크직의 소설은 그 이후, 즉 1941년 9월부터 1942년 2월 자살까지의 6개월의 시간을 그리면서 로테와의 망명 생활과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심경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로랑 세크직은 츠바이크의 죽음의 도정에 유대인 친지와 친구들의 죽음에 대한 죄책감과 무력, 공포, 제2차 세계대전 발발로 인한 완전한 절망, 끊임없는 망명과 유랑 생활로 인한 피로를 배치한다. 츠바이크는 1934년 가택 수색을 당한 후 런던으로 이주하지만 영국이 나치와의 전쟁을 선언하면서 '국내 거주 적국인'으로 낙인찍히고 반경 8킬로미터 내에서 이동을 제한당한다. 브라질에서는 "우리는 너를 찾아냈다. 우리가 널 뒈지게 하겠다. 너와 너의 유대인 암캐까지"라는 협박 편지를 받는다. 에른스트 톨러, 발터 벤야민 등의 자살 소식과 절친했던 요제프 로트의 죽음, 그리고 사방에서 쏟아지는 참담한 소식. 가령 나치는 증가하는 가스 자살을 막는다는 핑계로 유대인 가옥에 가스 공급을 중단했고, 치매에 걸린 요제프 로트의 부인은 나치의 장애인 집단 학살 정책 'T4 작전'에 의해 정신병원으로 끌려가 살해당했고, 곳곳의 유대인들이 열차로 실려 어디론가 끌려가고 있다는 소식은 지구 끝에 다다른 츠바이크를 끝내 압살하고 만다.

  츠바이크는 유럽의 문화와 이성이 나치의 광기로 끝장나고 말았다고 생각했으며, 남미에서 새롭게 발흥하는 문명을 낙관했다. 츠바이크가 미국에서 브라질로 떠난 것은 부인 로테의 천식 치료를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뉴욕의 망명자 집단들에 둘러싸여 '유대인 무국적자들의 초대 영사' 노릇을 하는데 지쳤기 때문이라고 로랑 세크직은 보고 있다. 츠바이크는 브라질에서의 과거 유럽의 가능성을 보았고, 그곳에서 환대받았으며 『브라질 미래의 땅』이라는 책을 쓰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희망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그 신생의 대륙에 뿌리 내리기에는 이미 늦었다고 생각했다. 로맹 롤랑은 츠바이크에게 보내는 서한에서 "자네가 브라질에서 정착할지는 잘 모르겠네. 그곳에 깊이 뿌리내리기에는 자네 나이가 많거든. 그리고 사람은 뿌리를 내리지 못하면 일개 그림자가 되고 말지"라고 했는데, 그의 염려대로 츠바이크는 자신에게 남아 있는 생이란 결국 '그림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말았던 것이다. 츠바이크는 페트로폴리스 집을 1942년 3월이면 비워 주어야 했고, 그 끊임없는 유랑과 도망에도 불구하고 1941년 12월 7일 일본의 진주만 습격과 미국 참전 소식에 큰 충격을 받는다. 지구 끝까지 도망간다 해도, 전쟁과 나치를 피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1941년 60세 생일에 쓴 시의 "체념의 그늘에서만 진심으로 삶을 사랑할 수 있네"라는 츠바이크의 비탄은 1942년 유서에서 "60세가 지나서 다시 한 번 완전히 새롭게 인생을 시작한다는 것은 특별한 힘이 요구되는 것이다. 그러나 나의 힘은 고향 없이 떠돌아다신 오랜 세월 동안 지쳐 버리고 말았다. 그러므로 나는 제때에, 그리고 확고한 자세로 이 생명에 종지부를 찍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라는 죽음에의 선언으로 이어진 것이다.

  로랑 세크직의 책에서 또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츠바이크가 자서전에서도 밝히지 않았던 두 번째 부인 로테의 이야기이다. 츠바이크는 1934년 25살의 로테를 만나 30년 간 함께했던 첫 번째 부인 프리데리케와 이혼하고 1939년 영국 바스 시청에서 그녀와 간단한 혼인 신고 절차를 치른다. 그러나 로랑 세크직에 의하면 로테는 거친 유랑 생활로 인해 천식, 불안으로 고통받아야 했고, 전처를 만나는 남편을 지켜보아야 했으며, 끝내는 동반 자살이라는 '비참'만을 몫으로 받은 여인이었다. 츠바이크는 회고록 『어제의 세계』를 집필하기 위해 뉴욕에서 전처 프리데리케를 지속적으로 만나면서 도움을 얻 는데, 심지어 그는 이를 위해 전처의 집 근처로 이사를 하기도 했던 것이다. 매일 아침 전처를 만나러 가는 남편을 지켜보는 로테의 심경을 로랑 세크직은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로테도 알고 있었다. 그와 프리데리케 사이에 육체적인 관계는 전혀 없다는 것을. 그게 더 끔찍했다. 그가 프리데리케와 나란히 빛나는 과거로 산책하는 모습을 상상하는 것이 두 사람이 한 침대에서 뒹굴었다는 사실을 아는 것보다 더 참담했다. (중략) 프리데리케는 모든 것을 알고, 모든 것을 기억했다. 츠바이크 부인은 오직 한 사람뿐이었다. (중략) 로테는 어제의 세계에 속한 사람이 아니었다. 이 책은 그녀의 관이었다. 그녀는 자기 관 뚜껑에 손수 못질을 했다. 슈테판과 프리데리케는 서로 안 지 30년이나 됐다. 로테가 그의 곁에서 살았던 불과 몇 년의 세월과 어찌 비교가 되겠는가?(『슈테판 츠바이크의 마지막 나날』, p.77) 

 

  세크직의 표현대로 로테는 불행하게도 츠바이크가 그토록이나 그리워하고 찬양하던 '어제의 세계' 바깥에 있는 여인이었다. 츠바이크는 회고록 『어제의 세계』가 끝나는 시점인 1939년에 이미 소멸을 시작한 존재였고, 그 옆의 로테 또한 '오늘'이라는 그림자와 허울만을 소유할 수 있는 여인이었던 것이다.

  이 비참한 여인의 내면이야말로 로랑 세크직의 소설에서 츠바이크의 우울보다 더 소설적으로 음울하게 빛나는 장면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츠바이크가 자신의 육체와 생의 영광을 가둬 버린 '어제의 세계'란 어떤 것인가?

  츠바이크의 글을 다 일독하지는 못했지만 그의 글들은 대체로 「체스 이야기」의 아마추어 체스 기사의 순수한 정신의 세계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평전과 심리소설로 유명한 그는 자신의 경험으로 글을 쓰는 작가가 아니라 상상력과 감성을 원천으로 글을 써 나간 작가라고 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그러나 『어제의 세계』라는 회고록에서 그는 처음으로 대지에 발을 딛고 있는 자신의 육신의 편력에 대해 실증적인 이야기를 풀어 가고 있다.

  6주에 걸쳐 완성한 400페이지의 『어제의 세계』(1941년 10월 탈고)는 로랑 세크직의 표현대로 나치의 만행으로 망가져 가고 있는 유럽의 폐허에 세운 일종의 '비석' 같은 글이다. 츠바이크는 『어제의 세계』의 머리말에서 "우리의 세대처럼 그토록 높은 정신적인 절정에서 이와 같은 도덕적 몰락을 감수해 본 적은 결코 없었다. (중략) 우리의 오늘과 어제 사이의 모든 다리는 파괴되어 버렸다. (중략) 전쟁 전에 나는 개인의 자유라고 하는 것의 가장 높은 단계와 형태를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후 수백 년 이래의 가장 저속한 상태를 알게 되었다"라고 고백하고 있다.

  요컨대 츠바이크의 '어제의 세계'란 진보와 이성을 믿고, 교향악처럼 빈 도시가 찬란한 예술의 도시로 꽃피고 그 속에서 개인의 정신적 자유를 향유할 수 있었던 세계를 의미한다. 또한 그것은 츠바이크가 지향한 바 '코스모폴리턴'으로 자유롭게 세계를 누비면서 세계를 경험하고 명사들과 교류하면서 예술 문화를 창달했던 그러한 때를 의미한다. 물론 그것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오스트리아 시민들은 부유층에게만 주어졌던 선거권 획득을 위해 거리로 뛰쳐나갔고, 반유대주의 정치인 칼 루에거가 빈 시장이 되기도 했지만 그러한 혼란 속에서도 공적인 제도는 '개인의 자유'를 최고로 여기는 츠바이크 개인을 위협하지는 않았다. 츠바이크는 빈이 예술의 중심 도시로 부상하는 빛나는 시절에 사회 현실의 시끄러움 싸움에서 초연히 물러나 문학에 심취할 수 있었던 것이다. 김나지움의 권위적이고 획일적인 학교 제도가 젊은이들의 자유로운 정신을 통제한다 해도, 츠바이크를 비롯한 방외인들은 이에 반항하며 시에 열광할 수 있었다. 17세의 츠바이크는 졸라와 스트린드 베리, 도스토예프스키, 베를렌느, 랭보, 니체를 열독했고, 보들레르나 윌트 휘트먼의 시를 모조리 암송했으며, 또래의 천재 문인 호프만슈탈을 만나 영감을 얻을 수 있었다.

  그에게 대학에서의 전공은 별 문제가 되지 않았는데, 왜냐하면 대학은 오직 그의 '정열을 위해 시간과 자유'를 제공하는 기관일 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빈 대학에서, 그리고 한 학기를 보낸 베를린 대학에서 츠바이크는 한 학기에 학교에 두 번 가는 것으로 족했다. 한 번은 강의 등록을 위해, 또 한 번은 이름뿐인 재적 청강 증면서를 받기 위해서였다. 그는 "아카데믹한 작업은 평범한 재능의 소유자에게는 아주 실용적이며 편리하고 유익하다고 하더라도, 개성적이며 창조적인 사람에게는 없어도 좋은 것이며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역효과될 수 있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리하여 그는 제도 바깥의 '인생 대학'에서 예술적 동지와 함께 문학에 대한 열정을 높여갔다. 책 표지에 쓰여진 "슈테판 츠바이크가 만난 136명의 거인들"이라는 문구에서처럼 그의 '어제의 세계'에는 그가 만난 명사들로 가득 차 있었다. 로맹 롤랑, 로댕, 릴케, 고리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토스카니니, 제임스 조이스, 엘렌 케이 등 예술 문화 인사를 비롯해 독일 외무장관 발터 라테나우와 이스라엘 건립의 정신적 지도자인 테오도르 헤르츨, 그리고 정신분석학 항시자 프로이트에 이르기까지 『어제의 세계』는 차라리 전기 작가 슈테판 츠바이크의 인물 사전이라고 불러도  무방할 만큼 다양한 인물에 대한 기록들로 넘쳐난다.

  몇 가지 에를 들면, 런던 망명 시절 끽연가 프로이트 말년에 구강암으로 고통받던 장면이나 보수적인 확회에 대해 완고히 등을 돌린 그의 학자적 면면, 세속과는 전연 무관한 릴케비상한 민감성과 타인과 절대 섞이지 않는 독자적인 고요함, "위대한 사람은 언제나 친절하며, 실생활에서 가장 검소할 뿐 아니라 모든 위대한 예술 성취의 비밀은 무아지경의 집중"이라는 교훈을 가르쳐 준 로댕, 『유대 국가』라는 소책자를 통해 전 세계에 흩어진 유대인을 끌어모았던 시온주의자 테오도르 헤르츨, 그리고 레닌의 러시아 동행을 거절하고 "어떤 그룹에도 가담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전쟁에 맞선 평화주의자 로맹 롤랑과의 25년 간의 편지 왕래, 유대인이면서 히틀러 치하에서 '나치 제국 음악원 원장직'을 맡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예술적 이기주의와 합작 공연, 버나드 쇼와  H.G.웰즈가 벌인 펜싱보다 더 번뜩이는 기지의 결투 등등, 이 일화들을 묘사하는 츠바이크의 문장은 전기 작가 특유의 활력과 생동감으로 넘쳐 늘 아쉬움으로 페이지를 넘겨야 할 정도이다.

  츠바이크는 이렇듯 가장 창조적인 사람들과의 우정이 "이상하게도 자신의 창조에는 위험한 요소"가 되었으며, "나는 모든 참된 가치에 대해 너무 많이 배웠던 것이다. 그것은 나를 주저하게 만들었다."고 토로하고 있지만, 그가 직접 경험한 거장들의 화려한 목록과 인상을 읽다 보면 이는 아주 작은 투정에 불과한 것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이러한 화려한 정신적 세계를 자랑하는 츠바이크도 20세기 전반기 유럽에 속한 사람이었다. 그는 찬란한 유럽 문화에 대한 향수와 함께, 그것이 어떠한 현실 속에서 어떻게 파괴되었는지를 핍진하게 증언하고 있다. 가령 제1차 세계대전 발발의 원인에 대해 그는 '힘의 과잉 상태'에 의한 것이라고 보고 있는데, 산업혁명 이후 대량생산과 기계화에 의해 생활은 윤택해지고 풍요로워졌고, 그만큼 축적된 힘과 자신감은 세력 확장으로 뻗어나갔다는 것이다. 그것은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에 참여하는 오스트리아인들이 보인 과잉된 도취, 애국심과 로맨티시즘, 낙관주의의 현실적 토대이기도 했다. 슈테판 츠바이크의 친구들과 주변 작가들은 전쟁에 동조했으며 광신적 애국주의자로 변모한 그들은 전쟁에 회의적인 츠바이크를 패배주의자로, 배신자로 멀리했다. 그때의 고독을 츠바이크는 어떤 망명이라 하더라도 "혼자서 조국에서 사는 것만큼 나쁘지는 않았다"라고 적고 있다.

  제1차 세계대전 후 세대가 어떻게 전통과 기성에 반발했는지를 기록하고 있는 장면도 흥미롭다. 청년은 부모와 교사를 믿지 않았고, 무조건적인 반항은 동성애 유행을 가져왔고, 큐비즘 초현실주의, 현대음악으로 발현되었다는 것인데, 이러한 맥락은 전위예술에 대해 다시금 생각할 수 있게 해 주는 지점이다.

  500페이지가 넘는 방대한 분량의 『어제의 세계』가 그리고 있는 20세기 전반 유럽을 다 여기서 언급할 수는 없다. 다만, 츠바이크라는 유대인 지성이 남긴 육성은 그 어떤 역사 교과서에서도 볼 수 없는 진귀한 것이라고 분명히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 책이 주는 감동은 이 거대한 기록과 증언을 이끌어 가고 있는 츠바이크의 파토스이다. 그 파토스는 국경 바깥에 서 있는 난민, 여권을 상실하고 철조망 아래 하염없이 서 있는 망명자의 그것이다.

 

  1914년 이전에는 대지는 모든 인간의 것이었다. (중략) 내가 1914년 이전에 인도와 미국을 여행했을 때는 여권이 없었고, 또 그런 것은 도대체 본 적도 없었다고  들려줄 때면, 그들이 신기하다는 듯 놀라는 것을 나는 언제나 재미있어 했다. (중략) 오늘날 국경은 세관, 경찰, 헌병대와 함께 모든 사람의 병적인 불신 때문에 철조망으로 변해 버렸지만, 그 당시에는 국경은 단지 상징적인 선을 의미하는 데 지나지 않았으며, 그리니치자오선을 넘어서는 것과 마찬가지로 별로 신경을 쓰지 않고 넘어갔다. 대전 후에야 비로서 국가주의에 의한 세계 혼란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우리 세기의 이 정신적 유행병이 가져온 첫 번째로 눈에 보이는 현상은 외국인 싫어하기였다. (중략) 망명이라는 것은 이유가 무엇이든, 그 자체가 이미 불가피하게 평형 상태를 흐트러뜨리는 것이다. 사람은 자신의 대지를 딛고 살지 않으면 , 꿋꿋한 태도를 잃게 되며, 또한 불안해지고 자신감이 없어지게 된다. 그러나 이것은 경험하기 전에는 이해할 수 없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나는 외국 것인 서류와 여권을 갖고 생활해야만 하게 되었던 그날부터 이미 나 자신에게 속해 있지 않다는 느낌을 가지게 되었다. 나의 근원적인 본래의 자아와 자연적인 동질성을 가진 무엇인가가 영원히 파괴되어 버렸던 것이다.나는 원래의 성질과 어울리지 않게 소극적이 되고, 이전에 코스모폴리턴이었던 나는 어떤 외국의 민족에게서 받고 있는 숨 쉴 공기 하나하나에 대해서도 지금은 특별히 감사해야 한다는 감정을 가지게 된다. (중략) 나는 거의 반세기에 걸쳐 나의 심장을 코스모폴리턴으로 '세게시민'으로 고동치도록 길들였건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내가 여권을 상실한 날, 58세의 나이로 나는, 고향을 잃는다는 것은 경계선을 만들어 놓은 한 줌의 땅을 잃어버린다는 것 이상의 것을 의미한다는 걸 발견했던 것이다.(『어제의 세계』, pp.501-504)

 

  위 글에 담긴 망명자의 비애는 "민적 없는 자는 인권人權이 없다. 인권이 없는 너에게 무슨 정조貞操냐"(한용운, 「당신을 보았습니다」)라는 능욕 속에서 살았던 일제 식민지 지식인의 울분과 같은 것이다. 아이러니한 것은 끊임없이 세계시민이고자 했지만 그가 국가주의와 인종주의의 희생물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테오도르 헤르츨을 만났을 때도 그의 유대 국가 건립 운동에 거리를 두었으며, 시온주의도 경계했다. 그는 어느 대목에서 "코스모폴리턴적인 몽상 속에서 무국적 상태가 되어 어떤 나라에 대해서도 의무를 지지 않고, 그러므로 오히려 모든 나라에 구별 없이 속하게 된다면, 그것은 얼마나 멋진 일"인가에 대해 언급한 적이 있다. 그러나 그는 곧이어 "인간의 상상력이라는 것은 얼마나 불충분한 것인가"라고 고백하고 있다. '개인과 정신의 절대 자유의 현현인 세계시민'과 나치의 유대인 학살, 『어제의 세계』는 이 거리와 낙차를 가장 크고 분명하게 보여주는 책이다.

  슈테판 츠바이크, 그는 세계적 작가였으나 고향에서 자신의 책은 화형당해야 했고, 유럽 최대의 장서가이며 필적 수집가였으나 모두 두고 떠나야 했으며, 가장 '정신'적인 삶을 살고자 했으나 유대인이라는 육체에 갇혀 정체성을 상실해야 했고, 세계시민이고자 했으나 세계 어느 곳에서도 평온할 수 없었다. 『어제의 세계』의 서문에서 절규한 "그토록 높은 정신적인 절정에서 이와 같은 도덕적 몰락"이란 다름 아닌 츠바이크 자신이며, 이 책은 그 몰락의 기록인 것이다.

  츠바이크는 프로이트의 말을 빌려 또 이렇게 적고 있다.

 

  인류가 도덕적으로 향상될 수 있는가 하는 점에서 지극히 회의적이다. 우리의 문화와 문명이라는 것은 다만 표면의 엷은 층에 지나지 않으며 이것은 어느 때고 심층 세계의 파괴적인 힘에 의해 와해될 수 있는 것이라고 갈파한 프로이트의 학설에 우리는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어제의 세계』, p.23) 

 

  츠바이크는 인류의 진보와 이성이 어떻게 스스로를 파괴하는지를, 문화와 문명이 얼마나 무력한지를 유대인이라는 가장 비참한 자리에서 목격하고 체험했다. 그는 그가 이끌렸던 패자들의 운명처럼, 그가 끝내 지키고자 했던 개인의 자유와 정신을 앞세우고 죽음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로랑 세크직의 표현대로 "죽음을 향해 걸어가는 패망한 백성의 군대를 이끄는 장수" 츠바이크, 끝내 육체와 국가 바깥에 있고자 했던 그는 숭고한 죽음 대신 '정신'으로 지금까지 살아남아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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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디아스포라로 읽는 세계문학밖으로부터의 고백』2017.5.15. <(주)함께하는출판그룹파란>펴냄

  * 정은경鄭恩鏡/ 고려대학교 독어독문확과 졸업, 동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석사/ 박사 학위 취득. 2000년《세계일보》를 통해 문학평론가 등단. 평론집『지도의 암실』『디아스포라 문학』, 연구서『한국 근대소설에 나타난 악의 표상 연구』, 현재 원광대학교 문예창작학과 부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