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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선학『질문들』: 미술비평의 실제와 현장(발췌)

검지 정숙자 2017. 8. 15. 21:23

 

 

    미술비평의 언어와 현장_(발췌)

 

    강선학

 

 

  전시기획과 전시라는 언어

  이성자 미술관에서 미술이란 무엇이고 전시란 무엇이며 그의 작품이 던지는 의미는 무엇인가. 그런 질문에 답하는 노력이야말로 도슨트의 임무이자 의무일 것이다. 도슨트는 언제나 관뢈자와 미술관 정책 사이에서 매개자로서 혹은 비평의 중개자로 입장일 것이며 단순한 설명자가 아니라 작품을 매개로 새롭게 생각하게 만드는 위치에 있다. 도슨트는 전시작품의 기존하는 설명이나 해석과 평가를 외우고 그것을 관람객에게 앵무새처럼 되뇌는 역할이 아니다. 더구나 이 작품이 얼마만한 재화로서 가치가 있는지를 말하고 그것을 사거나 팔거나 하는 소개의 역할은 더더욱 아니다. 이성자를 계기로, 이성자의 작품을 계기로 새롭게 삶과 세계를 느끼게 하는 것, 그것으로 이끄는 것이 전시기획이 무엇인지 이해하는 것이고 이성자를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다. 그런 도우미가 도슨트이다. 그게 미술관의 역할이고 전시의 역할이다. 그런 것이 언어이다. 전시 기획은 이런 배경 아래 이루어진다. (p.161-162)

 

 

  작용과 반작용의 자기내부와 경계

  조각가 김세중 선생의 기념관이자 생전의 거처였던 곳을 새롭게 꾸며 만든 곳이 '예술의 기쁨'이다. 김정혜의 작품이 놓인 그곳은 입체작품을 설치하기에는 작고 좁다. 그러나 그곳에 놓인 여섯 점의 작품은 김정혜의 특징을 일목요연하게 보여준다. <축제>와 <꿈> 외의 몇 작품이다. 소조와 부조이며 부산시립미술관에서 이미 봤던 작품들도 있다. 그것은 우선 종교적인 색채가 분명하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새로운 조형적 실험성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 두드러져 보이는 전시다. 종교적 색채는 개인적인 발상과 세계와의 만남을 만드는 힘이라는 면에서 타인이 그 가치를 평가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그러나 이 시대 한 작가의 조형적 성과로서 구태의연하기조차 한 날개 달린 인물들의 형상은 종교적 입장에도 불구하고 아무래도 접근이나 이해가 통상적인 정도에 기대고 있다는 생각을 버리기 힘들다. 그것은 작가에게 위험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인물을 구성하는 방법이나 소재로서 인물의 형상들은 시류를 거슬러가는 미학적 태도이지만 새로운 미학적 지형을 보여주기에도 아쉬운 점이 없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작품에서 읽히는 의미들은 무엇일까. 단아한 인상, 친근한 인물들의 형태, 약간의 움직임으로 함축된 동세들, 그런 것에서 오는 평이함이 주는 안락함일까. 아마 그런 점도 무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런 것이 장점으로 작동하기도 할 것이다. 부화한 시류에 휩쓸리지 않고 자신의 종교와 긴밀하고 부담 없이 만들어가는 친근한 형태가 주는 안락함이야말로 조형적 실험이 주는 과도한 실험의식과 의미의 과잉보다 더 깊고 넓은 평온을 줄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인상의 연속으로 시기적으로 역순인 부산시립미술관의 전시 작품들도 읽을 수 있다. (p.189-190)

 

 

  의미의 지연 없는 탐미적 묘사

  버려진 방안 창가에 쓰러져 하얗게 백골이 되어가는 날개 단 인물이 눈길을 끈다(심점환, 일몰 oil on canvas  130.3×162.1㎝  2016). 온전하게 몸을 이루는 뼈를 다 갖춘 백골에 날개를 단 인물이다. 날개를 달았으니 인간은 아니다. 인간이 아닌 것이 인간의 버려진 창가에서 주검으로 놓여 있는 것이다. 날개를 단 이 인물은 무엇일까. 하얗게 백골로 진행되는 인물 아닌 인물의 묘사는 '인간의 이상'이 그렇게 허무하게 백골로 스러지는 희망의 헛됨을 보여주는 극단적 이미지일까. 날개 달린 이의 죽음은 애틋함과 착잡함 혹은 비극적 페이소스를 제공한다. 그리고 인간과 인간을 구원할 기대마저 무너진 현실의 비애감을 증폭시켜 준다. 그렇게 현실이 읽혀진다. 그러나 이 작품 속에서는 현실은 기화되고 그 의미가 읽혀지지 않는다. 그것은 사실 말하고자 하는 현실 정황을 유미적 상황으로 전환하고 보는 이의 감성을 통속적인 상투성, 나른한 비현실적 아름다움이나 과잉의 안타까움으로 전이되게 한다. 그렇다고 현실을 읽어내는 초현실의 차원이동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곳에서는 인간의 삶이 아닌 다른 삶이 전개되는 것이다. 인간이 사라진 끝에서 희망(날개 단 인간)조차 기대할 수 없는 난망한 현실 예견이라는 안타까움, 과잉의 통속적 감성을 환기시키지만 현실이 없다./ 창으로 들어오는 햇살 아래 창살이 드러나는 바닥에 주검으로 있는 날개 단 인물은 온전하게 날개를 달고 있지만 죽은 지 오래이다. 창은 너무 낡았고 창틀은 여기저기 모서리가 깨져 있다. 의자 위에 걸쳐져 있는 수건 한 장이 인간의 흔적으로 남아 있지만 창밖으로 펼쳐지는 하늘에는 황혼녘의 구름으로 덮여 무심하기만 한 <일몰>의 순간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도 너무 많은 이야기가 그 곳을 덮고 있다. 그렇게 그 말들은 넘치지만 막상 그 이야기에는 새로운 것, 말하지 못한 것들이 '비로소' 드러나지도 않는다.그곳은 어떤 타자의 말도 생성되지 못한다. 다른 말들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 말은 혼자하는 것이 아니다. 타자의 말들이 그곳에 반응할 때 언어로서 의미가 생기고 소통이 생성된다. 그리고 다른 말들의 호응에서 새로운 의미가 일어난다. 의미 생성에는 언제나 자신의 말이 지연되고 타인의 말이 개입하는 시간과 공간이 있어야 한다. 그것을 우리는 예술적 해석이거나 아양하게 읽혀지는 재해석의 가능성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 우리가 보게 되는 것은 완벽할 정도로 자신의 말만이 넘치는 장면이라는 것이다. 그 말은 이미 다 아는 말들의 범위에서 지연되는 의미가 만드는 새로운 담론의 생성보다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만 그곳을 차지하고 있다. (p.281-282)  

 

 

  회화-말의 촉감을 불러내는

  <억척어멈 일대기,정지영>는 조약돌 하나에서 그가 보아낸 세계와 모아내려는 세계가 다 들어 있다는 느낌을 대신해준다. 의상조사가 지었다는 범성계에 이런 구절이 있다. 일중일체다중일(一中一切多中一) 일즉일체다즉일(一卽一切多卽一) 일미진중함시방(一微塵中含十方) 일체진중역여시(一切塵中亦如是) 무량원겁즉일념(無量遠劫卽一念) 일념즉시무량겁(一念卽是無量劫)… 의상조사의 그 깊은 뜻을 가늠할 재간은 없지만 그저 이해한 만큼 읊어보자면, 하나 속에 모든 것이 있고 모든 것은 하나 속에 있으며 곧 하나다. 한 개의 먼지 속에 세계가 있고 일체의 먼지 속도 이와 같다. 헤아릴 수 없는 시간이란 한 마음이며 한 마음은 곧 한없는 시간이다./ 그러나 이런 이해의 한편으로 그에게서 조형을 묻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에게서 그리기는 조형적 효과나 표현의 세련을 시도하는 것이기보다 세계를 직시하려는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이런저런 재료들을 시험해보는 그의 작업은 풍부한 시각 이미지의 형성보다 자기 이야기를 표상하는 수단으로, 혹은 그것을 옮겨좋으려는 효율성의 탐색으로 보인다. (p.347-348)

 

 

  로컬의 포섭과 배제-기억과 재현으로부터 벗어나기

  설치는 작가 자신이 직접 하기도, 전시 담당자가 하기도 한다. 지시와 설명만 있으면 누구나 가능한 설치이자 작품이다. 누구나 설치 가능한 작업이라 실은 작품이라는 작가 전유의 고유한 성격을 만나기 힘들다. 누구나 한다. 그리고  누구나 만지고 움직일 수 있다. 그의 설치는 이런 유연성에 초점이 있을 것이다. 작가와의 대화에서 그는 그저 막대를 그렇게 두기만 할 뿐, 나머지는 보는 이들이 만지고 움직이고 하는데 무관하다는 태도를 확인할 수 있다. 말하자면 자신의 작품에 대한 독자적인 의미나 형태, 구성을 고집하지 않고  보는 이의 개입에 열어두고 있다는 것이다./ 다르게 보자면 감상자의 감상은 고정된 의미나 현상을 보아내는 것이 아니라 그곳에 개입하는 것이다. 막대를 지팡이 삼아 잠시 걸어보는 것도 감상의 일종이자 작품설치에의 개입이다. 관람자는 작가이자 감상자이며 작품 그 자체가 되기도 한다. 너에게 맡겨진 지팡이라는 짧은 문구는 그래서 생겨났다. 설치의 유연함은 그저 가변설치의 특징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작품이라는 기존의 개념을 부정하는 것이다. 작가라는 신비주의를 보는 이에게 넘겨줌으로 작가라는 우리의 상투적 이해를 무너뜨린다. 작가의 전유인 작품을 감상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개입한 작품을 자신이 감상하는 것이다. 작가와 작품, 작품 감상이라는 어법에 대한 새로운 제기이다. 작가도 작품도 감상도 분리되지 않은 세계, 홍현기의 지팡이(Canes  Wood, Steel, Mixed media, 90-110㎝  1997-2014) 는 그곳을 더듬고 있다. 그곳은 아직 드러나지 않은 메타포다. (p.449-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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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침묵을 언어로 전환하기『질 문 들강선학 미술비평집/ 2016. 9. 10. <아트랩> 펴냄

  * 강선학/ 1989년 『형상과 사유』를 시작으로『그림보기의 고독 혹은 오만』『반항과 욕망의 거처』『현대한국문화론』『상처에의 탐닉』『공격적 풍경』『현대한국화의 해석 지평』『은유의 도시』『비평의 침묵』『부산미술의 조형적 단층』『불만의 통속성』『불면』을 출간했다./ 부산시립미술관에서 10여 년 큐레이터로 일하다, 미술전문평론지 『크래커 달지않은…』의 필진으로 참여했다. 요즘은 그림 그리기와 글쓰기 사이의 접점을 화두로 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