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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미『오늘은 바람이 좋아, 살아야겠다!』「천재, 오, 긴 인내여!」: 폴 발레리

검지 정숙자 2017. 8. 1. 15:24

 

 

    천재,

   오, 긴 인내여!

     - 폴 발레리(1926~1973)

 

    김상미

 

 

    어느 누구도 발레리가 한 것 이상으로

                                    나아갈 수 없다.

                                      - 마르셀 레몽

 

 

  지중해의 바다와 하늘과 태양

  어느 가을, 혼자서 영와 <색, 계>를 보러갔다. 이안 감독의 영화는 늘 무엇인가를 내 가슴에 남긴다. 담배가 담배연기를 훨, 훨, 공중으로 날려보내고 재는 가슴에 남겨놓듯이, 그리고 그 잿가루 때문에 내가 조금씩, 조금씩 세월처럼 야위고 삭아가듯이, 이안 감독의 영화는 처절하게 아름답고 더러운 맹목의 일상이 어떻게, 어떤 식으로 반짝이며 닳아가고 빛바래어 가는가를 너무나 선명하게 잘 보여준다.

  다시 한 번 더 보고 싶을 정도로 가슴 저린 두 주연배우의 열연이 영화관을 나와 집으로 오는 내내 발길에 밟히고 또 밟혔다. 출구도 보호구역도 없는 막다른 사랑. 그 사랑의 비극을 지성이 아닌 감성으로 그토록 품격 있고 찬란하게 그려낼 수 있다니, 이안 감독은 역시 놀라운 사람이다.

  오랜만에 맛보는 감성의 극한 파문을 딛고 가을단풍이 아름답게 물든 길을 걸어 집으로 돌아오니, 지중해를 보러 간 친구에게서 온 편지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지중해! 그녀는 지웅해가 바라보이는 폴 발레리의 고향인 세트에 와 있다고 했다. 세트. 세트는 지중해 연안ㅇ의 프랑스 제2의 항구아. 말레리가 태어나고  발레리가 잠들어 있는 곳. 그곳에서 그녀는 발레리와 함께 맥주를 마시고 있다고 했다. 그의 묘비에 새겨진 그의 시 「해변의 묘지」의 한 구절(오, 사유 다음에 오는 보상, 신들의 고요에 대한 오랜 시선이여!)과 함께.

  아, 해변의 묘지! 바다가 바라보이는 언덕 위에 있다는 생 샤를 공중묘지. 발레리가 그곳에 묻히면서 묘지 이름 자체가 아예 '해변의 묘지'로 바뀌어버렸다는, 가파른 절벽 위의 공중묘지. 경사가 아주 심한 비탈 언덕 위라 아래에서 보면 아치 묘비들이 주르르 흘러내려 바다로 쏟아질 것 같잉 보인다는 그 '해변의 묘지'.

  그곳에서 발레리와 함께 있다니 얼마나 좋을까? 언젠가는 나도 꼭 지중해에 가보리라 맹세한 적이 있었건만.

 

 

  바람이 일어난다! 살아야겠다!

  크나큰 대기는 나의 책을 열고 또 닫는다.

  파도는 물안개가 되어 바위에서 힘차게 용솟음친다!

  날아가라, 광명에 눈이 어두운 책장들이여!

  무너뜨려라, 파도들이여! 무너뜨려라 즐거워하는 물결로

  작은 돛단배들이 먹이를 쫓고 있는 이 고요한 지붕을!

   - 폴 발레리, 「해변의 묘지」중에서

 

 

  그러고  보니 발레리를 처음 내게 소개해준 것도 그녀였던 것 같다. 바닷가 출신은 바닷가 출신을 단번에 알아본다며, 처음 본 순간, 서로의 핏속에서 출렁이는 바닷물 소리를 절대 놓치지 않았다며, 그녀가 내게 읽어준 발레리의 「해변의 묘지」. 우리는 그 시에서 지중해의 바다와 하늘과 태양을 취하기 위해 얼마나 여러 번 그 시를 읽고 또 읽었던가.

  우리가 그때 가진 것은 이곳저곳에서 모은 발레리의 시 몇 편과 짧은 글 몇 편 정도였지만, 우리는 그것을 소중히 공책에 베껴 쓰고 또 베껴 썼었다.(나는 아직도 우리나라에 번역된 그의 시집을 갖기 전, 이곳저곳에서 모은 그의 시들이 적힌 공책을 갖고  있다. 그가 평생 스승으로 생각한 스테판 말라르메의 시들과 함께.)

  상징과 비약이 많은 그의 시들은 그 당시의 우리들이 이해하기엔 어려운 점도 많았으나, 파도를 작은 돛단배에 비유하거나 "바람이 일어난다! 살아야겠다!" 등의 시구만으로도 발레리는 단번에 우리들을 매료시키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시를 좋아하고 시를 쓰고 싶은 우리에겐 섬광같이 다가오는 그의 글 한마디! "시는 감탄사의 발전이다"라는 그 한마디! 그 메시지는 오랫동안 우리들에게 시란 무엇인가에 대한 의욕적 사고의 물꼬가 되어 주었다. 그런 발레리와 함께 지중해의 푸른 바다를 바라보고 있다니. 얼마나 감개무량할까.

 

 

  끝없는 지적 모험

  폴 발레리. 그는 19871년 지중해 연안의 작은 항구 도시인 세트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모두가 지중해 정신을 타고난 바닷가 태생들이다. 하여 발레리 역시 지중해의 후예답게 명쾌하고 지성적이며 뛰어난 이야기꾼이었다. 그는 몽펠리에 법과대학에서 수학하면서 그곳에서 피에르 루이스, 앙드레 지드, 스테판 말라르메 등을 만났다.

  운명처럼 다가온 말라르메와의 만남은 그에게 대단한 감명을 주었다. 그리고 그로 하여금 상징주의 시에 눈뜰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그때의 그의 나이 21세(1892). 그로부터 그는 말라르메의 가장 충실하고 진정한 제자가 되지만, 문학에 대한 깊은 회의 - 정서적이고 감상적인 예술 활동이 명료하고 논리적인 사고에 발해가 된다는- 때문에 일체의 문학 작업에서 선을 놓아버린다. 그가 원하는 건 모호한 감상과 평범한 사고에서 벗어나 지성의 절대 의식에 도달하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선 그에겐 문학이 아니라 고도의 지적 훈련을 통한 '자아의 투시'가 필요했다. 자기 자신에 대한 철저한 인식과 사고, 그리고 그에 대한 과학적 훈련과 연구!

 

 

  나 자신에 대한 연구, 그러한 관심 자체에 대한 이해, 그리고 나 자신의 존재의 특성을 스스로 분명하게 추적하고 싶은 욕망, 이런 생각들은 거의 한시도 나로부터 떠난 쩎이 없었다. 이러한 남모를 병은 사실상 그 근원은 문학 때문이었는데도 나를 문학으로부터 멀어지게 했다.

  - 폴 발레리, 『기억의 단편들』중에서

 

 

  그의 고백처럼 그는 의식적으로 문학을 멀리하고, 오로지 자신의 가능에만 모든 관심을 집중하기로 결심하고, 23세 되던 해 (1894년) , 세트를 떠나 파리에 입성, 지금의 폴 발레리 가 40번지( 이 집은 인상파의 여성 화가인 베르트 모리조가 지은 집으로 발레리는 이곳에서 40여 년간 살았다)에 정착했다. 그는 이곳에서 매일 새벽 4시나 5시쯤 일어나 글을 쓰거나 수학자이며 물리학자인 푸앨카레의 책을 읽었다. 수학과 과학에 대한 그의 강한 관심은 엄밀하고 명석한 것, 논리적인 것에 대한 그의 본능적인 취향을 만족시켜 주었다. 그에게 있어 지의 탐구는 바로 방법의 탐구를 의미했다.

  그는 날마다 새벽에 일어나 커피와 담배가 준비되어 있는 서재에서 출근(그는 아바스 통신사 사장의 개인 비서로 일하고 있었다) 전짜지 글을 쓰거나 자신의 탐구에 몰두했다. 이 일은 그가 죽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러다 틈틈이 쉬고 싶을 땐 그림을 그렸다. 그의 그림 취미는 세트에서 수없이 스케치한 바다 그림이 낳은 습관 때문이었다. 1970년 세트 시에 의해 세워진 '발레리 기념관'('해변의 묘지' 담 너머에 있는)에 가보면 그가 그린 그림과 조각들이 전시되어 있다.

  그는 그림이 시보다 더 지성적인 예술이라고 생각하여, 20여 년간 그렇게 시 작업을 멀리하고, 그림에 열중하며 끝없는 지적 모험을 강행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그 과정에서 그가 별견한 이상형이었다.

  그가 보기에 네오나르도 다 빈치는 그가 되고자 하는 '사유에 의해 이루어진 인간'형이었다. 그가 쓴 『드가 ·· 데생』에 보면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렘브란트의 그림을 비교해 쓴 부분이 나온다.  "사람들은 사물을 눈으로 보기보다는 오히려 자가용의 개념, 용어사전에 따라서 본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이 보는 '미경'에 무엇 하나 새로이 보태지도 못하고  무엇 하나 파괴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어떠한 이해의 틈새에도 그의 정신의 산출물을 끼워 넣는다. 그는 모든 건축물을 고쳐서 세운다. 나는 그의 그러한, 천차만별한 재료들을 완전히 자기 것으로 만드는 그 모든 '방법'에 마음이 끌린다. 그는 놀이를 즐기고, 대담하며, 자기의 모든 감정을 보편적인 언어 속에 명석하게 표현한다. 마치 말라르메가 완벽이라는 관념을 언어의 과학과 혼인시켜 시를 읊어내듯이. 그에 비해 렘브란트는 그가 본 것을 지지하고 받아들인다. 여자들은 있는 그대로이다. 뚱뚱한 여자나 말라깽이 여자들 그대로이다. 그가 그린 미인들은 형태에 의해서라기보다는 그 자체의 생기가 흘러나와 미인들일 것이다. 그는 무게가 나가는 두툼한 지방질의 살이나 주름 잡힌 배, 커다란 사지, 붉고 우둔한 손, 아주 상스러운 얼굴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는 그 모든 것을 그에게만 속한 빛으로 젖어들게 하고 스쳐 지나가게 한다. 그는 누구 못지않게 현실, 신비, 동물적인 것과 선적인 것, 가장 섬세하고 가장 힘센 일, 그리고 그 그림이 표현한 바 없는 가장 깊고 가장 고독한 감정을 색과 함께 혼합한다."

 

  그렇게 그는 매일 아침 일어나 자신의 노트에 그림이 주는 매혹과 시시각각 변용하는 세계와 자기 자신에 대한 관찰, 언어에 대한 성찰의 결과를 기록했다. 그리고 1895년 『레오나르도 다 빈치 방법서설』을 발표하고, 연이어 1896년, 그의 문학적 분신인 테스트 씨를 창조, 『테스트 씨와 보낸 저녁나절』을 펴냈다.

  그가 창조한 테스트(테스트란 프랑스어로 '머리'를 뜻함) 씨는 오직 지성만을 우상으로 여긴 그의 분신이며 충족을 모르는 그의 의식이 만들어낸 인물임에는 분명하지만, 그 실제 모델은 프랑스 화가인 드가였다고 한다. 드가 역시 지적이면서 동시에 감성적인 인간이며, 유동적인 동시에 고정적인 존재였가고 한다. 한마디로 그 둘 다 시시각각으로 변용하는 자신의 모습에 골몰해 있는,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이라는 두 가지의 가치에만 짐착하는 목잡한 인간형이라는 뜻이리라.

 

 

  다시 시의 세계로

  하지만, 한번 시인은 영원한 시인일 수밖에 없는 게 모든 시인의 운명이다. 발레리는 앙드레 지드와 갈리마르 출판사의 강력한 권고와 설득에 의해 다시 시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우선 젊은 날 써두었던 시들을 손질하고, 그동안 쓴 시들을 모아 『젊은 파르크』(1917)를 펴냈다. 이 시집은 출간되자마자 대단한 반응을 불러일으키며, 그가 20여 년간 떠나 있었던 시세계로 그를 다시 끌어들였다. 

  그는 연이어 시들을 발표하고, 시집들(『해변의 묘지』와 『구시첩』(1920) 『매혹』(1922)을 출간했다. 그 힘으로 그는 순식간에 프랑스 문단을 대표하는 시인이 되어 1925년 아카데미 프랑세즈 회원으로 선출되었다. 

  다시 시를 쓰기 시작한 그는 말라르메보다 더 힘찬 지성과 견고한 상상력으로 언어를 조각하고 언어에 색깔을 입혔다. 그러나 그의 절대적 명증성에 대한 원초적 집착은 그의 시가 유명해지면 질수록 그를 불편하게 했다. 왜냐하면 시는 영감이 아니라 구성의 산물이어야 하는데 자신도 모르게 불쑥불쑥 영혼과 육체의 강렬한 매혹에 이끌려 절대적 순수 정신을 깨트리게 될까 구려웠기 때문이다. 그때마다 그는 자신의 탁월한 시적 감수성에 의도적인 자물쇠를 걸고는 열성이란 예술가의 정신상태가 아니다. 시인에게 필요한 것은 영감이나 정열이 아니라 맑은 의식과 각고면려刻苦勉勵하는 노력이다. 나는 무아 상태에서 번갯불을 기다리느니보다 맑은 정신, 의식적인 의지를 가지고 나의 마음대로 반짝거리는 불꽃을 만들기를 좋아한다"며 애써 감정을 배제했다. 뿐만 아니라 "시는 행위라기보다는 오히려 연습, 해방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탐구"라고 자신을 다독였다.

  이렇듯 그는 작품보다는 작품의 구성과 제작에 훨씬 더 주의를 기울이면서, 매순간 자기 자신을 분석하고 성찰하려는 욕망을 포기하지 않았다. 또한 그는 "참된 시인은 누구나 일급의 비평가이다"라며, 비평과 창작을 분리하지 않았으며, "시란 시인이 조금씩, 조금씩 지붕으로 옮겨놓는 거창한 무게와 같은 것이고, 독자는 갑자기 그 무게를 뒤집어쓰고서는 곧 이어서 시인이 그것을 지을 때는 결코 알지 못했던 압도적인 일상과 완벽한 미학적 효과를 그 순간에 거기서 받는 행위다."라고 정의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다른 여러 시인들과 초현실주의자 시인들처럼 결코 시적 표현을 왜곡시키거나 시형식의 틀을 파괴하려고 시도하지 않았다. 그에게 있어서 시는 무엇보다도 언어의 예술, 명료하게 깨어 있는 의식이었기 때문이다.

 

 

  천재! 오, 긴 인내여!

 

  온갖 것이 두뇌에 의존하고 있다. '사람들'이라는 것이 존재하기 위해서도, 또 그것이 다소나마 서로 알기 위해서도, '이 세상에 있는 자'가 헤어진 후에 다시 만나기 위해서도, 서로 정보를 교환하기 위해서도, 또한 그 관계를 복잡하게 해가기 위해서도. - 인간의 두뇌는 거기서 사람들이 자신의 실재를 확인하기 위해 자기 몸을 찌르고 꼬집는 장소인 것이다. 인간은 생각한다. 따라서 나는 존재한다고 '온 세계의 사람들'이 말하고 있다.

  - 폴 발레리, 「모랄리떼」중에서

 

 

  연이어 낸 시집으로 프랑스 최고 현대 시인으로 극찬 받았으나, 그는 시집 『매혹』을 끝으로 더 이상 시에 손을 대지 않았다. 대신 에세이나 비평, 칼럼 등을 썼다.

  그 자신이 끝없는 지적 탐구가 결국은 아무런 성과도 보상도 없이 끝날 것이란 걸 알면서도, 아니 지에 대한 명상보다는 삶에 대한 명상에서 훨씬 더 귀중한 자양분을 얻을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그는 자신만의 탐구(知의 탐구)를 그만둘 수가 없었다. 비록 의식의 오만이 의식의 재앙을 초래한다 해도, "아아, 허무여, 너야말로 위대한 사물의 초라한 어머니!"라고 그를 부르짖게 만든다 해도, 그는 끝까지 자신 속의 절대(知)를 추적하고 추적해 내고 싶었다.

  익은 석류가 그 과잉에 못 이겨 스스로 입을 벌려 그 속의 붉은 보석을 드러내듯이.

 

 

  알갱이들의 과잉을 못 이겨

  반쯤 벌어진 단단한 석류들이여,

  스스로의 깨달음에 파열된

  숭고한 이마들을 보는 것 같구나!

 

  오, 반쯤 열린 석류들이여,

  너희들이 인내한 수많은 나날의 햇빛이

  자랑스럽게 애써 온 너희들로 하여금

  홍옥의 격벽을 찢게 했을지라도

 

  말라붙은 황금의 외피가

  어느 강렬한 힘의 요구로

  과즙의 붉은 보석으로 터진다 해도,

 

  이 찬란한 파열은

  일찍이 내가 가졌던 어느 영혼의

  은밀한 구조를 꿈꾸게 한다

    - 폴 발레리, 「석류」전문

 

 

  그렇게 평생 동안 철학적 혼미에 갈등하며 자기 자신을 찾아다닌 발레리. 언제나 그 자신의 모습을 응시하고 그 자체의 비상을 동경하며, 의식적으로 이상적인 인간정신을 끊임없이 연습했던 발레리. 천부의 시적 재능을 타고났음에도 무시하기 이를 데 없는 극단의 의식세계로 풍덩! 하고 온몸을 던졌던 발레리.

  그가 그것에서 얻는 게 무엇이고, 잃은 것이 무엇이든 나는 아직도  그의 『모랄리떼』를 읽으면 가슴이 뛰고, 「해변의 묘지」를 읽으면 바람 부는 해변에 서서 "바람이 일어난다!  살아야겠다!"고 외치고 싶어진다.

 

  하늘 아래 누구보다도 타고난 시인이었음에도 평생을 시적 유혹과 감성적 자질 사이에서 줄타기할 수밖에 없었던 발레리. 언어가 가진 모든 능력이 가장 맑은 정신과 의식적인 의지 아래서 타오르는 지성의 불꽃이 되길 원했던 그.

  "천재, 오, 긴 인내여!"

  그는 언제나 그만큼 위대하고, 그만큼 오만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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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이 사랑하고 사랑한 작가 11인의 창작노트

  오늘은 바람이 좋아, 살아야겠다!』김상미 지음/ 2017. 7. 28. <나무발전소> 펴냄

  * 김상미/ 부산 출생, 『작가세계』로 시인 등단,  시집『모자는 인간을 만든다』『우린 아무 관게도  아니에요』등, 산문집 『아버지, 당신도 어머니가 그립습니까』, 사랑시 모음집『나보다 더 나를 사랑한 당신』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