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역에 반하다 · · · 8회>
감각, 기억,
경험으로 읽기
류수열/ 한양대 국어교육과 교수
"모든 사람은 본성적으로 알기를 원한다." 지금으로부터 약 2300년쯤 전에 살았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서 『형이상학』은 이 문장으로 시작된다. 물론 아리스토텔레스도 모든 생명체는 무엇인가를 알고 싶어한다고 했다. 모든 생명체는 감각으로 앎의 욕망을 달성한다. 그중의 일부 생명체는 기억하는 능력을 지니고 있고, 또 그중의 일부 생명체는 경험을 통해 앎을 성취한다.
그것이 인간이다. 나아가 그중의 일부 인간들은 실생활의 문제 사태를 해결하는 데 앎을 활용하며, 또 그중의 일부는 실생활에서의 필요를 벗어나서도 무엇인가를 알기를 원한다. 이것의 앎의 위계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통찰이다. 그가 명시적으로 밝히지는 않았지만, 경험 이후 단계에서부터 앎을 위해 인간이 하는 일은 대부분 읽기일 것으로 짐작된다.
처음 이 글을 접했을 때는 모든 생명 중에서도 인간이 가장 우월하다는 인간 중심주의의 시선이 보였다. 감각과 기억은 벌레나 곤충도 인간과 공유하는 것이므로, 그리고 인간 중에서도 연륜으로 표상되는 경험을 초월하여 공부를 하고 탐구할 수 있는 일부의 인간들에게 바치는 헌사로도 읽혔다. 경험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질 수밖에 없는 앎의 한 형식이므로.
이에 대한 회의가 든 것은 연암 선생의 한 서신을 접하고 나서였다. 경지라는 이에게 전하는 서신에서 그는 당대의 지식인들에게 독설을 쏟아부었다. 독설인즉, 명색이 부지런히 글을 읽는다는 자들이 마른 먹과 낡은 종이 사이에 시력을 쏟아 그 속에 있는 좀 오줌과 쥐똥이나 찾아 모으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에게 "술찌끼를 잔뜩 먹고 취해 죽겠다" 하는 격이라며 비수를 날린다. '저 허공 속에 날고 울고 하는 것'을 새 '조(鳥)'나 새 '금(禽)'이라는 글자에 가두지 말라 했다. 그러면서 공중의 새를 두고 "오늘 나는 참으로 글을 읽었다"며 서신을 마무리한다.
이를 나는 문자로 유통되는 정보의 바다에서 허우적거리면서 그 진위와 선악을 구별하지 못하는 우리 시대의 새로운 문맹에 대한 경고로 받아들였다. 오늘날 '읽다'라는 타동사의 목적어 자리에 뉴스나 영화도 종종 놓이긴 하지만, 그래도 그 자리를 가장 많이 차지하는 것은 여전히 문자 혹은 글이다. 그것이 무엇이든 우리가 읽는 것은 일종의 상징 기호이다. 문자도 영상도 무엇인가를 지시하는 기호일 뿐, 그 자체로 어떤 사물이나 현상은 아니다.
문자에 담긴 의미를 읽는다는 것과 그 의미가 지시하는 어떤 실체를 아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상징적 기호인 서울의 지도를 내 주머니에 가지고 있다고 해서 서울 자체가 나의 소유가 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18세기 선비 연암이 간파한 것도 바로 이 점이 아니었을까.
문자나 영상을 읽되 거기에 담긴 의미에 도달하지 못하고, 의미를 읽되 그 의미가 지시하는 대상에 이르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하물며 글을 쓴 사람의 마음을 읽는 일이야 일러 무엇 하겠는가. 영상을 읽는 장면에서는 더하다. 드라마나 영화를 보면서 우리는 그 캐릭터가 아니라 배우를 본다. 감동마저도 배우 자체의 아우라를 근원으로 삼는다. 마치 서울 지도를 가지고 서울을 소유한 것처럼 착각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야말로 또 다른 의미의 문맹이라 할 것이다.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킨다면 우리가 보아야 할 것은 손가락이 아니라 달이어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통찰에 따른 앎의 위계를 자의적으로 끌어들여 그 처방을 내린다면, 그러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감각과 기억, 그리고 경험이다. 정작 우리는 문자를 읽기 시작하면서 원초적인 읽기의 형식이었던 감각과 기억, 경험을 저 멀리로 밀어내 버렸으니까.
인간은 본성적으로 무엇인가를 읽어 왔다. 농부들은 밤하늘의 별과 달을 읽어 날씨를 짐작했고, 사냥꾼은 동물들의 발자국을 읽어 사냥감의 행방을 가늠했다. 도박꾼은 상대방의 동작과 눈동자를, 관객은 가수의 목소리를 읽는다. 엄마는 아기의 표정을 읽고, 연인들은 사랑하는 이의 육체를 읽는다. '읽기'라는 말의 뜻은 이다지도 넓은 것이다. 인간은 문자가 출현하기 이전부터, 나아가 역사 이전부터 읽기를 본성적으로 해 왔던 것이다. 오히려 이런 읽기들이야말로 본질적인 읽기라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때의 읽기는 오롯이 감각, 기억, 경험에 기대고 있었던 것이다. 문자 문화를 넘어 시각 문화가 압도하는 오늘날의 읽기가 가지는 역설이라 하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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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에세이』/ 2017-5월호 <주역에 반하다 · · · 8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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