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한 편

'어사(於斯)'의 뜻/ 김억중

검지 정숙자 2017. 5. 4. 13:30

 

<문학에 깃든 건축 · · · 7회>

 

 

    '어사於斯'의 뜻

   

    김억중/ 건축가 · 한남대 건축과 교수

 

 

  많은 이들이 배산임수背山臨에 그림같은 전망을 찾아 헤매는 경우를 자주 본다. 좋은 땅을 찾으려 하는 것이 잘못된 생각은 아니지만, 그런 땅은 흔하지도 않을 뿐더러, 그런 곳일수록 땅값도 비싸려니와, 기껏 어렵게 땅을 구했어도 혹시라도 난개발이 시작되면 그 어떠한 절경도 오래 가리란 보장이 없다. 땅이란 상대적인 차이는 다소 있을지언정 애초부터 명당, 길지가 따로 있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미망이 아닐까 싶다. 다산 정약용 선생이 지었던 '어사재於斯齋' 기문을 읽어보면 집 지으려는 이의 마음가짐이 어떠해야 할지 소중한 가르침을 얻을 수 있다.

 

  "내가 지니지 않은 사물을 바라보고 가리키며 '저것'이라고 한다. 내가 지니고 있는 것을 의식해 자세히 보고는 '이것'이라고 한다. '이것'이라는 것은 이미 얻어서 내 몸에 지니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내가 손에 넣은 것이 내 바람을 채우기에 부족하다면 만족시켜 줄만한 것을 바랄 수 없게 되어, 그것을 바라보고 가리키며 '저것'이라고 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천하의 공통된 근심거리다." (정약용, 어사재기於斯齋記)

 

   다산은 세상의 이치와 삶의 지혜를 깨닫고 실천하는 것 모두 내 몸 가까이, 바로 '이것'에서 해법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여기서 '이것'이라 함은 시간적으로는 미래가 아닌 '지금'을, 공간적으로는 다른 곳이 아닌 '여기'를 일컫는다. '저것'에 현혹되어 그 꿈을 좇느라 평생 동안 땀을 흘리고 숨을 헐떡이면서도 정작 '이것'을 누릴 줄 모르는 것이야말로 어리석고 공허할 뿐이라고 말한다.

  그러고 보면 내가 앉아 있는 위치만큼 높은 곳도 없으며 내 몸이 점유하고 있는 현재 위치가 곧 세상의 중심인 셈이다. 나를 중심으로 만물의 현상이 작동하고 일상의 삶이 전개되는 이곳, 지금 바로 여기가 "지극한 존귀함이 존재하는 곳"이요, "천하의 선이나 미가 모두 '이것'으로써 극치를 이루니 '이것' 위에 다시는 더 할 것이 없다"라고 주장할 만하지 않은가?

  실제로 '여기'의 뜻을 되새겨봄직한 감동적인 일화가 전해 내려오는데, 그 중에서도 조선시대 역관을 지낸 임희지라는 분의 집 이야기를 백미로 꼽을 수 있다.

  그 분은 물속에 뜬 달을 즐기려 하였으나 집터가 하도 작아 서까래 몇 안 되는 작은 집을 짓고 나니, 빈터라곤 반 이랑도 남지 않아 연못 만들기가 마땅치 않았다 한다. 게다가 울안에는 샘물조차 나지 않아 참으로 난감하였으나, 그는 자신의 처지에 굴하지 않고 사방 몇 자 안 되는 못을 기어이 만들어, 그 안에 쌀뜨물을 모아 부어 놓고 못 가에서 휘파람을 불며 "내가 수월水月이라 자호自號한 뜻을 저버리지 않으리니, 달이 어찌 물을 가려서 비추리오?"라고 노래하였다 한다. 아! 비록 맑고 깊은 물은 아니었겠으나 뿌옇고 탁한 물속에 뜬 우유 빛 달의 정취를 즐기려 했던 집주인의 풍류를 어찌 괴벽이라고만 탓할 것인가? 보잘것없이 초라하기만 한 '이곳'이지만, 기꺼이 즐기며 누리고자 했던 '저기'의 꿈을 이루어내려 했던 '어사'의 정신이 살아있으니 말이다.

  그런 눈, 그런 마음으로 풀 한 포기, 사소한 미물에 이르기까지 그 집과 끈끈한 인연을 맺어주려 한다면, '이것'이 곧 세상에 하나 밖에 없는 소중한 풍경으로 바뀔 수 있다. 집주인 또한 그렇게 살아 숨쉬는 '이곳'의 정취와 삶의 애환을 노래하는 것만으로도 주거의 기쁨을 맘껏 누릴 수 있지 않겠는가. 집을 짓되 '이곳'에서 취할 바를 보물처럼 소중하게 드러내어, 때로는 추억 속에 담기도 하고 때로는 꿈속에서도 새록새록 즐길 수 있을만하다면, '이곳'이 바로 무릉도원이지, 이상적인 낙원이 '저곳'에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 '이곳'만이 지닌 독특한 지리를 잘 살펴보면, '이곳'을 기쁨으로 노래할만한 것들을 얼마든지 발견할 수 있다. 문제는 '저것'이 아니라 '이것'으로 향하는 간절한 마음이 있어야 '이것'만의 진정한 가치가 눈에 들어온다는 사실이다. 요컨대 '어사於斯'의 뜻을 따르려는 마음가짐이 있어야 비로소 집다운 집을 얻어 행복을 누릴 수 있는 법이다.

  어사於斯, 어사, 어사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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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간에세이』/ 2017-5월호 <문학에 깃든 건축 · · · 7회>